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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도 나토도 오지 않았다…‘인계철선’ 없는 우크라의 참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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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호 03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러시아 침공 이틀째인 25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주민들이 지하 대피소에 피신해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 침공 이틀째인 25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주민들이 지하 대피소에 피신해 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가 1991년 독립 이후 최대의 국가적 고난에 직면했다. 초강대국과 일대일로 맞붙기가 불가능한 국면에서 차선으로라도 인계철선(trip wire)을 확보하지 않으면 언제든 힘의 논리에 짓밟힐 수 있다는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이 우크라이나에서 새삼 확인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수도 키예프가 함락 위기를 맞은 25일 새벽(현지시간) 정장이 아닌 사복 차림에 턱수염도 깎지 않은 초췌한 모습으로 국민 앞에 등장해 “러시아의 공격으로 군인과 민간인 137명을 잃었고 316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발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홀로 남겨져 나라를 지키고 있다. 누가 우리와 함께 러시아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며 “누가 우크라이나에 나토 회원국 자격을 보증할 것인가. 모두가 두려워한다”고 토로했다. 이날 연설 장면은 러시아의 침공 직후 전쟁을 위해 우크라이나의 모든 장비와 역량을 동원하는 국가 총동원령을 선포한 뒤 공개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얘기한 대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우크라이나를 도울 군사적 개입에는 선을 긋고 있다. 당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이유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 문제를 거론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 주도의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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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과 나토는 러시아 제재를 강화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참전 불가 입장을 연이어 밝혔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독일에 미군 병력 7000명을 추가로 파병하겠다”면서도 “미군이 우크라이나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 역시 “우크라이나에 나토군을 파견할 계획은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은 방어적인 것”이라며 군사적 참전에서 발을 뺐다.

대신 미국과 나토는 독일·폴란드 등 나토 회원국들을 중심으로 전력을 증강하며 일종의 ‘방화벽’을 쳤다. 우크라이나가 위기를 맞았는데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바깥에서 “넘어오지 말라”며 병력을 추가하는 모양새다.

그러다 보니 이번 침공은 러시아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침공 첫날인 지난 24일 “우크라이나군 시설 83곳을 무력화했다”고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이 이날 침공을 선언하며 “우크라이나 점령 의사는 없다”고 밝혀 일각에선 국지전이 전개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지만 전혀 아니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남·북·서쪽 방면에서 동시에 진격하며 주요 군사 거점을 장악하자 군사력에서 절대적 열세에 몰린 우크라이나는 속수무책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25일 “러시아 병력이 거의 모든 방향에서 진격을 저지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의 공격은 계속됐다. 외신들이 전하는 현지 영상에는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장면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개전 이전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소총을 들고 “우리 땅은 우리가 지킨다”며 결사항전 의지를 불태웠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 경비대의 저항이 없었다고 알리고 있다.

이처럼 러시아의 침공과 개전 초기 상황에서 드러난 우크라이나의 ‘외로운’ 저항은 근본적으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일방적인 국력·군사력 차이에 기인하지만,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약점을 보완할 인계철선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인계철선은 침입하는 적들이 건드리면 폭발물이나 조명탄·신호탄 등을 터뜨려 살상하거나 적의 침입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철선을 뜻한다. 한반도에선 북한군이 남한을 공격했을 때 미군도 함께 공격받으면서 미국의 자동 개입을 촉발하는 장치를 의미한다. 즉 남침 가능성을 줄이는 전쟁 억제력이자 전쟁 발발 시 공격군을 격퇴할 대응 전력의 개념이 인계철선이다. 하지만 이게 우크라이나엔 없었다.

전직 군 고위 관계자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공격 계획을 세우며 미국의 참전 가능성을 변수로 생각했을 것”이라며 “현재 상황에선 미국이 참전할 수 있는 근거와 장치(인계철선)가 없는 상황에서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수 있는 전쟁에 미국이 나서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게 침공을 결정한 배경 중 하나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 등 러시아에 맞설 수 있는 나라들과 군사동맹을 맺었거나 자국 땅에 미군이나 나토군이 있었다면 시작도, 전개도 쉬운 전쟁이 아니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상호방위조약 등 미군의 자동 참전 장치가 없다. 우크라이나는 또 아직 자격을 갖추지 못해 나토에 가입하기 전이어서 나토군 역시 나서기 어렵다. 고재남 유라시아정책연구원장은 “나토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하려면 법치와 인권, 언론 자유 등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1991년 옛 소련 해체 후 이제 막 탈공산화한 동유럽 국가들은 신생 국가로서 이 같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가입 조건에 미비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등 가장 먼저 탈공산화했던 동유럽 국가들은 나토에 가입했지만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 친러파와 친서구파로 정권 교체가 이어지면서 사회 혼란이 극심했고, 이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내전 등을 겪으면서 나토 가입 요건(내전국 배제)을 갖추지 못했다.

결국 미군이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도울 결심이 있다면 6·25전쟁 때처럼 유엔군을 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전쟁에 나선 만큼 안보리 차원에서는 논의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즉 우크라이나 스스로 러시아에 맞서거나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전봉근 국립외교연구원장은 “미국은 자국 영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때 동맹국에 인계철선을 설치한다”며 “강대국끼리 부딪칠 경우 핵전쟁으로 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인계철선을 제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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