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우크라이나]미·러 국제 질서 주도권 다툼에 우크라 ‘화약고’ 폭발…외교 실패한 ‘끼인 국가’의 비극

중앙선데이

입력 2022.02.26 00:02

업데이트 2022.02.26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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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호 08면

SPECIAL REPORT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화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도네츠크·루간스크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승인하고 이들 국가에 평화유지군 파병을 승인했다. 미국은 이를 침공의 시작이라며 강하게 규탄하고 1차 제재를 즉시 발동한 뒤 공격 수위에 따라 강도를 높여갈 것을 예고했다. 우크라이나는 국가 비상령 발동하며 결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결국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위기가 빠른 속도로 확산돼 왔지만 사태 전개의 추이에 있어 의아한 부분도 적잖다. 미국이 러시아를 몰아가는 방식과 러시아의 대응 모두 다 그렇다. 지난해 11월 말 정규 군사훈련을 마친 러시아 부대의 원주둔지 복귀가 지체되며 우크라이나 서부 국경 인근에 머무는 상황을 미 언론이 보도하자 미 정부는 이를 전쟁 시나리오와 연관시키며 위기설을 전파했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군사력을 더욱 집결시키며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불가를 문서로 보장하라고 맞받아쳤다. 이 같은 러시아의 요구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분주한 외교 행보가 시작됐다. 러시아가  서방의 발목을 잡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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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예방적 정보 공개 전술로 러 압박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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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에 맞서 미군과 나토군을 동유럽에 추가 파견하고 재배치하며 군사적 압박 수위를 높이는 한편 러시아의 전쟁 결정과 전쟁 개시일, 침공 경로 등을 대통령과 장관이 언론에 잇따라 공개하며 전쟁 시나리오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전례 없는 예방적 정보 공개 전술로 러시아를 압박한 것이다. 러시아는 전쟁 의도를 계속 부인했지만 벨라루스와 연합 훈련을 개시하며 군사적 대응 강도를 더욱 높였고 이로 인해 외교적 타협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졌다.

미국의 이런 대응을 처음부터 의도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인정했듯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과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톡톡히 효과를 본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전술’에 대해 학습한 미국이 이번엔 가능한 행태의 최대치를 예상한 뒤 미리 정보를 공개해 압박함으로써 러시아에 전략적 혼선을 주고 추가 행동을 저지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러시아가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 전술은 일단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위기 전개 과정에서 외교와 타협의 여지를 줄이면서 상황을 전쟁에 가깝게 몰아갔다는 점에서 외교의 실패로 볼 수도 있다. 어설픈 외교를 할 나라가 아닌 미국이 왜 러시아를 이렇게 몰아붙인 것일까. 또 러시아는 왜 미국의 전쟁 몰이 압박에 초강경 대응을 하며 사태를 전쟁 단계로까지 고조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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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기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난맥은 이런 의문을 푸는 몇 가지 단초를 제공한다. 우크라이나는 한국처럼 유라시아의 주요 중추국(pivot state) 중 하나이긴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와의 전쟁을 불사할 만큼 큰 전략적 가치를 갖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지구적 안보 질서 차원에서 적극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위협을 강조해 유럽의 동맹 진영을 결집하고 나아가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켜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완성하겠다는 의도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 손상된 핵심 동맹 세력의 결집력을 복원하려는 조치인 셈이다.

더 나아가 독일의 노르트 스트림2나 프랑스의 아시아 핵연료 재처리 시장 진출 등 유럽 국가들의 독자적 행보를 견제하고 유럽과 러시아의 경제적 상호 의존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결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추구하는 ‘규칙 기반의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를 복원하기 위해 동맹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함으로써 러시아나 중국의 이질적인 국제 질서 구축 노력을 견제하려는 이념적 특성을 내포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유럽 지역의 안보를 튼튼히 함으로써 중동에서의 영향력 하락도 저지하고 아·태 지역에 좀 더 집중하며 미·중 전략 경쟁을 수행할 기반도 닦을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입장은 선명하다. 탈냉전 직후 러시아는 거대 유럽의 일원으로 협력적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을 기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토는 신규 회원국에 나토군을 배치하지 않겠다는 파리 나토 정상회의 약속을 저버리며 동진을 지속했고 옛 소련 공화국까지 영역을 확장하고자 했다. 미국이 주도한 나토 확장은 러시아의 안보를 희생하고 얻어진 유럽 안보 체제의 성과였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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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동진을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는 이후 국력을 회복하고 군사력을 재건하며 나토 동진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전략도 ‘수세적 방어’에서 ‘공세적 방어’로 바꿨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으로 러시아의 민족주의적 보상 기재가 일정 부분 채워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역사·문화적으로 동질성이 강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결국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저지와 유럽 안보 체제 조정이란 이슈를 강력히 제기하며 서방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전통적인 강대국 정치의 세력권 각축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국내 정치적 고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나토의 군사적 확장뿐 아니라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의 확산을 의미한다. 색깔 혁명에 대한 우려에는 러시아의 약화와 분열을 획책하는 미국의 음모라는 의식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식 민주주의 전파를 차단하고 러시아의  안보 문제를 해결하는 성과는 푸틴이 2024년 선거에서 승리하는 튼튼한 발판이 될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중간선거를 치러야 하는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러시아라는 ‘적’과의 투쟁이 외부로 시선을 돌려 내부를 결집시키는 최고의 카드가 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크라이나 갈등이 적당히 깊고도 길게 가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전면 침공 후 친러 정권 수립 가능성

현실은 결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귀결됐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는 러시아의 군사행동을 두고 돈바스 지역의 공화국들을 크림반도 방식으로 합병하고 사태를 조기에 마무리하거나, 2014년 푸틴이 구상한 ‘노보로시야 구상’에 따라 돈바스 등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장악해 러시아 본토와 크림반도를 연결하는 방안이 예견됐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면 침공을 택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해 무장을 해제한 뒤 친러 정권을 세우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서방에서 공급받은 무기로 우크라이나의 게릴라전 방식의 저항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적잖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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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전면적으로 수도 키예프까지 장악할 경우엔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질 수 있다. 일단 미국이나 나토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민간인의 게릴라전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가 우려되며 이는 나토의 군사 개입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이런 우려에 따라 러시아는 개전 초기 압도적인 무력으로 우크라이나 내 군사시설을 무력화한 뒤 조기에 전쟁을 끝내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이후 러시아는 확실한 우위를 바탕으로 동부 우크라이나 분할 및 우크라이나의 비무장 ‘핀란드화’ 방안을 미국과 서방에 시혜처럼 제안하고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풀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든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이 주도하는 강력한 제재의 여파와 함께 유럽에서의 신냉전적 구도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를 어떤 식으로 끌어가야 할지 유럽 국가들의 고민도 깊어갈 것이다. 글로벌 세력 재편도 가속화될 전망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의 회복 노력은 지정학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다극적 지역 질서를 구축하려는 러시아와 중국의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러시아의 안보적 우려를 서방이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며 러시아 편을 드는 모양새지만, 이 여파가 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쳐 불안정성을 고조시킬까 경계하는 눈치다. 이런 갈등의 여파는 동북아시아에서 북·중·러 대 한·미·일의 냉전적 대립 구도를 재연시킬 수 있고, 이는 한국 외교의 자율성을 한층 제약하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중간국, 국익 중심 실용 외교 균형 찾아야

우크라이나는 외교적 균형이 중요한 지정학적 중간국으로, 유라시아 맞은편에 형성돼 있는 또 다른 단층대에서 본질상 동일한 구조적 압력을 마주하고 있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중·러의 전략적 협력 연대와 미국이 대립하는 지구적 안보 구도와 나토 동진 및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는 유럽의 지역 정세가 우크라이나의 내부적 균열 구조와 중층적으로 맞물리면서 불거졌다는 점에서다.

우크라이나의 경험은 지정학적으로 ‘끼인 국가’가 지정학적 단층대가 활성화되는 상황에서 정밀하게 계산되고 준비되지 않은 채 외교적 균형의 변화를 시도할 경우 어떤 위험이 초래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자유주의 국제 질서와 강대국의 지정학적 충돌이란 환경에 미리 대비하지 못했고, 국내적으로도 이질적인 동·서부를 모두 포용하는 외교정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지정학적 환경 변화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과 통합적 외교안보 정책의 국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만큼 한국도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중간국 외교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미동맹과 중국과의 관계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사고에 휘둘리지 않고 대외 환경의 조건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반해 국익 중심의 실용적 외교 균형점을 찾아야 할 때다. 우군을 많이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와 비슷하게 미·중 사이에 낀 중간국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다양한 다자협력망을 구축해 안전판을 마련하며 외교적 자율성의 공간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런 과제는 신냉전의 파고가 높아가는 시기에 차기 정부가 전력해야 할 핵심 숙제가 될 것이다.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복합안보센터장과 외교부·국방부 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유라시아의 도전과 국제관계』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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