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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우크라이나]‘한 국가 두 문화’ 1100년…열강들 충돌 때마다 전쟁 포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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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호 10면

SPECIAL REPORT 

우크라이나 동부 레이더 기지에서 한 차량이 24일 러시아군 포격에 파괴됐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동부 레이더 기지에서 한 차량이 24일 러시아군 포격에 파괴됐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는 서구 강국과 러시아 갈등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국가 중 하나다. 1·2차 세계대전 등 글로벌 세력 재편으로 이어지는 전쟁이 발발할 때도 주요 열강들이 결코 놓치지 않으려 했던 핵심 영토로 꼽혔다. 서유럽과 러시아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수성과 러시아와의 태생적 유사성 등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군사적·경제적 중요성이 그 어느 지역보다 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최초의 국가가 성립되고 1991년 옛 소련의 품에서 벗어나기까지 1100년의 세월과 냉전 종식 후 30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수난의 역사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 대륙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면적이 넓은 나라다. 882년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건립된 키예프 루스 공국은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일대에 거주했던 루스인들이 세운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였다. 이후 1240년 몽골의 침략을 피해 주민들이 동북부 지역으로 대거 이주한 곳이 지금의 모스크바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서로 자신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를 계승한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핵심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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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땐 동족끼리 싸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면 유럽 국가들과는 식량과 천연자원 등을 매개로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우크라이나는 곡물 경작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흑토 지대여서 밀·옥수수·보리 생산량이 주변국들보다 월등히 많다. 농업 환경이 열악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빵바구니’로 불리는 이유다. 식량뿐 아니라 철광석·석탄·니켈·흑연 등 핵심 원자재 매장량도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며 주변국의 원자재 공급을 도맡아 왔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지정학적 위치도 남다르다. 우크라이나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만나는 요충지이자 러시아와 유럽이 서로 오가는 관문인 탓에 패권 세력 간 갈등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1700년대 발트해 주도권을 놓고 러시아와 스웨덴이 맞붙은 대북방 전쟁 때는 스웨덴 편에 섰는데 스웨덴이 결국 패하면서 동맹국인 우크라이나 주민들까지 강제 노동에 동원되는 등 전쟁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기도 했다.

18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약 120년 동안은 우크라이나 영토가 둘로 쪼개져 주변국들의 지배를 받았다. 영토의 약 80%는 러시아 제국에, 나머지 약 20%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분할됐다. 이 무렵부터 러시아 제국 치하의 우크라이나는 점차 러시아의 일부로 전락한 반면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우크라이나는 서유럽 영향권에 들면서 상대적으로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두 개의 문화권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1853~56년 크림 전쟁은 우크라이나 땅에서 러시아 제국과 유럽 열강이 본격적으로 맞붙은 싸움이었다. 표면상으로는 크림반도 내 러시아의 흑해 함대 주둔을 둘러싼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충돌이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저지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군 형태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을 지원 사격하면서 전쟁은 국제전으로 번졌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이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무엇보다 1차 세계대전은 우크라이나에 뼈아픈 역사로 남아 있다. 동서 두 지역으로 나뉘어 동족끼리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제국이 연합국과 동맹국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르면서 우크라이나인들도 연합군에 350만 명, 동맹군에 25만 명이 각각 참전하게 됐다. 이후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까지 이어지면서 우크라이나는 소련·폴란드·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 등 4개국으로 분할됐다. 국가가 하나로 통합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쪼개지게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1991년 옛 소련 해체 후 더욱 짙어졌다. 70년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 독립을 꿈꿨지만 옛 소련이 물려준 5000여 개의 핵무기 탓에 주변국의 집중 감시를 받아야 했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1994년 강대국들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핵을 모두 폐기하는 내용의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핵무기의 짐을 벗을 수 있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외부적 갈등 요소는 털어냈지만 정작 더 크고 깊은 분쟁의 불씨는 우크라이나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과 가깝게 지낸 서부 지역과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동부 지역이 오랜 기간 둘로 나뉘어 독립적인 생활권을 유지하다 보니 ‘한 국가 두 문화’ 체제가 고착화됐고, 이로 인해 대통령선거를 치를 때면 친서구파와 친러시아파의 극한 충돌이 반복되곤 했다.

2개 주 독립 선언으로 갈등 고조

2014년엔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불리는 반정부 시위로 물러나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하는 강경책으로 대응하면서 또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침략이 아니라 원래 러시아의 일부였던 땅을 돌려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크림반도 합병엔 유럽의 영향력이 러시아의 앞마당까지 확대되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푸틴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199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체첸 전쟁과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의 연장선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더욱이 우크라이나 곳곳이 혼란에 휩싸인 틈에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등 러시아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2개 주가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부 갈등은 극에 달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과의 유혈 충돌로 1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2014년 9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중재로 민스크 휴전 협정이 체결됐지만 이후에도 반군의 무장투쟁과 이에 맞선 정부군과의 교전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서구 진영과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 속에 ‘잠재적 화약고’로 불리던 이 지역은 최근 또다시 포연에 휩싸이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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