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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위기의 우크라, 이게 동맹 없는 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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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22일 대국민 연설에 나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연합뉴스]

22일 대국민 연설에 나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전날 ‘평화 유지’ 명목으로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병력 진입을 명령한 것을 두고 “주권 침해”라고 규탄하며 서방 파트너들에 “확실한 지원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서방 파트너인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군사 개입보다는 외교와 무역·금융 제재 카드만을 언급하고 있다.

한국에서 7000㎞ 이상 떨어져 있지만 우크라이나 전운은 지난해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때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안보에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조 바이든의 미국’이 동맹과 우방을 지키려는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한국이 우크라이나와 같은 지정학적 안보위기를 피하려면 한·미 동맹의 ‘진화’를 위해 어떤 협력을 해야 하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21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아래 사진)이 우크라이나 친러 공화국 독립을 승인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제재를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로이터=연합뉴스]

21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아래 사진)이 우크라이나 친러 공화국 독립을 승인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제재를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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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수교한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동맹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은 ‘전략적 파트너십에 대한 헌장’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해 ‘흔들림 없는(unwavering)’ 지지를 수차례 표명해 왔다. 하지만 이런 약속이 제재마저 감내하겠다는 냉혹한 국제 안보질서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이행될지는 미지수다.

만약 우방국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침공당하는데 미국이 실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동맹국인 한국이 위협에 처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물론 한국은 우크라이나와는 상황이 다르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한쪽이 무력공격을 당할 경우 다른 한쪽도 자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대처하게 돼 있다. 미국은 이를 ‘철통 같은(ironclad) 방위 공약’으로 표현해 왔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이 이런 공약을 어떻게 실제 행동에 옮길 것인지를 가늠해 보는 간접적인 시험대가 될 수 있다.

21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친러 공화국 독립을 승인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위 사진)은 이들에 대한 제재를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로이터=연합뉴스]

21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친러 공화국 독립을 승인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위 사진)은 이들에 대한 제재를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국 역시 새로운 동맹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지가 될 수 있다. 5월 들어설 새 정부에 한·미 동맹 진화 이슈가 첫 번째 숙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한국은 군사안보를 넘어서는 글로벌 동맹 관계로 확대하자는 미국발 이니셔티브에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해 왔다.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한국과 미국은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저해, 불안정 또는 위협하는 행위를 반대한다”며 “우리는 한·미 동맹이 국제적 역할을 확대함으로써 중대한 도전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할 것임을 인식한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북한과 중국도 미국의 우크라이나 사태 대처법 예의주시

지난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군 장악 지역인 도네츠크시에서 친러시아 활동가들이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행진하고 있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돈바스 지역의 친러 분리세력이 수립한 2개의 지역 정부를 국가로 승인하고 평화유지군 명목의 러시아군 진입을 명령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군 장악 지역인 도네츠크시에서 친러시아 활동가들이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행진하고 있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돈바스 지역의 친러 분리세력이 수립한 2개의 지역 정부를 국가로 승인하고 평화유지군 명목의 러시아군 진입을 명령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정부는 이날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전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며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러시아를 향해)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에 대한 침해이자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력히 규탄하며, 즉각적인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동향만 소개했다. 제재에 대해서도 “러시아에 대해 강도 높은 제재 조치를 취하게 되면 우리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만 말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이날 “러시아의 국제법 위반을 강하게 비난한다”며 제재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과는 대조적이다.

러시아의 침공이 현실화된다면 당장 한국의 대러 제재 동참 여부가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고재남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는 “러시아는 중요한 에너지 자원의 공급처이며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국가”라며 “미국 주도의 제재 동참 시 우리 기업의 경쟁력 약화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날 폴란드 중서부 포즈난시 프리덤 스퀘어에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 [EPA=연합뉴스]

이날 폴란드 중서부 포즈난시 프리덤 스퀘어에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 [EPA=연합뉴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이 추진하는 대러 제재의 핵심은 동맹을 총동원한 포괄적 이행에 있고, 특히 한국과 일본에 거는 기대가 크다”며 “이번에 대러 제재에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가 동맹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중국과 북한도 미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미국이 이번에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중국으로선 미국이 대중 견제의 큰 원칙으로 외쳐 온 동맹과 우방 규합이 실제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인식할 수 있다”며 “대만 문제에서도 말과는 달리 적극적 대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날 도네츠크시에서 예금을 인출하려고 현금자동인출기(ATM) 앞에 줄을 선 사람들. [AP=연합뉴스]

이날 도네츠크시에서 예금을 인출하려고 현금자동인출기(ATM) 앞에 줄을 선 사람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사태는 북한에 또 한번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지금 겪는 위기는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통해 핵을 내려놨기 때문이라는 핵무기 집착에 또 다른 근거가 될 수 있어서다. 문 대통령도 이날 “우크라이나 정세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노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지난 5일 ‘우크라이나는 30년 전 거대한 핵무기를 포기한 걸 후회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소련이 붕괴했을 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미국 등으로부터 국가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수천 개의 핵무기를 내줬다”며 “그러나 푸틴 대통령 같은 리더가 급부상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지금은 핵무기를 갖고 있던 과거가 오히려 나았다는 여론도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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