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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가나 판에 박은 질문ㆍ대답(안희창기자가 본 평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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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화의 공통분모 찾기 힘들었던 3박4일
평양으로 가는 길은 처음부터 「착오」로 시작됐다.
16일 오전 9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자마자 예상이 빗나가는 일들이 빚어졌다.
불과 며칠전 이 경계선을 넘어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석한 우리측 대표들은 북측의 열광적인 환영에 파묻혔는데 이번에는 환영인파가 거의 없었다.
깃발을 들고 『조국통일』을 외쳐대는 북측 사람들의 질문공세를 예상하고 몇가지 모범답안까지 준비했었으나 소용이 없게 됐다.
동시에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라는 의문이 스쳤다.
그러나 해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판문점 북측 지역에 있는 통일각에서 북측 관계자에게 사유를 물었다.
1초도 지체없이 『림수경 때문이야』라고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평양으로 가는 기차도 타기 전에 기자의 머리속은 「통일」을 위한 만남과 「림수경」이라는 단 두 단어가 한동안 지배했다.
수백,아니 수천번도 더 들은 것 같은 이 두 단어가 북한에서는 남북 고위급회담의 분위기를 바꿀 만큼 중요한 함수관계에 있는 것일까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으나 이 역시 결론은 쉽지 않았다.
「통일」과 「림수경」이라는 이 단순한 단어들을 엄청난 감각의 차이로 해석하는 북쪽 사람들과 만나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취재를 해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북한이 90년 10월이라는 현 시점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에 취재의 초점을 두기로 했다.
북한이 변해가고 있다고 현지 취재한 보도들은 전하고 있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북한 사람들도 스스로 변화를 느끼고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결론부터 먼저 내린다면 3박4일의 취재를 마친 후에도 이에 대해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담에서 남북한이 서로 말은 주고 받았지만 「말」이 아니라 「딱딱한 그 무엇」이 오가는 것 같았다.
어디서도 대화의 「공통분모」를 찾기가 어려웠다.
「민족」,「혈육」,「동포」까지는 의견일치를 보았으나 「하나의 조선」문제부터는 얘기가 복잡해져 「통일」에 이르러서는 난마처럼 얽혔다.
서로의 실상과 진의를 파악하는데는 엄청난 인내와 대화노력이 필요하다는 느낌에 사로 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강물의 깊이를 재는데는 1m자 보다는 10m자가 유용하나 태평양의 깊이를 측정하는데는 둘 다 소용없다.
육지에서 같은 이치가 적용될 수 있는 곳이 북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 3박4일이었다. 산천은 「하나」였으나 사람들의 생각은 「둘」이었다.
한겨레라는 동류의식과 분단 45년에서 오는 괴리감을 함께 맛보았던 일정을 정리해 본다.
◎“통일”“림수경” 빼면 이야기 못할 지경/「변화」 안중에 없고 “당이 모든 것 해결”/고급자재로 꾸민 당간부 연회장엔 디스코 무희도
북한은 현재 대외 관계에서는 변화있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사회주의 고수 및 확대정책을 쓰는 2중노선을 가고 있다는 것이 전반적인 느낌이다.
그동안 일본과의 수교방침이나 강영훈 총리의 김일성주석 면담 등을 통해서보면 북한은 「변화」의 기미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높은 「불변의 벽」
그러나 방북기간중 접한 상황이나 만나본 북측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오히려 정반대인 것 같은 「불변의 벽」에 부딪치기 일쑤였다.
이같은 현상이 북한의 2중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대외적 변화」의 움직임은 결국 집단주의ㆍ획일성 등 기본원칙의 틀로 인해 제대로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해석하는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무언가 변한 것 같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곳이 오늘의 북한이다.
18일 저녁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주최한 만찬이 벌어졌던 목란관.
이곳은 노동당 직속 연회소로 대리석ㆍ샹들리에 등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고급자재로 꾸며졌다.
식사가 끝나가자 「왕재산 전자악단」이 출연,공연을 시작했다.
피아노ㆍ색서폰ㆍ전자기타ㆍ드럼 등으로 구성된 이 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무용과 노래가 벌어졌다. 디스코풍에 다리가 날씬한 무희도 등장했다.
『고향의 봄』이 흘러 나왔고,『세 목동』이라는 무용이 펼쳐졌다.
독창가수는 흰 양복,빨간 나비넥타이에 흰색구두를 신고 있었다.
혁명예술을 주창하고 있는 북한에서도 이런 장면이 벌어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당이 싸움만 하는줄 아느냐』는 안내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북한의 최고위급 인사들만 이용하는 곳이고 보면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남조선 수령이죠”
이를 「총체적인 변화」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17일 오후 방문한 만경대학생 소년궁전은 부지 10만3천평방m,길이 2백80m,너비 1백90m,높이 60m의 문자그대로 거대한 궁전이었다.
하루 1만명이 서예ㆍ그림ㆍ풍금 등 각종 학습을 받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한성일이라는 다섯살짜리 어린이에게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김정일화와 고양이ㆍ쥐를 그릴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비둘기를 그릴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갔다. 그러자 어린이는 『그릴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면서 『쥐는 노태우고 고양이는 조선인민입니다』라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노태우는 누구냐』는 질문에 『남조선 수령이죠』라고 답한 이 어린이는 『쥐는 쌀을 훔쳐서 인민의 식량을 줄입니다』고 「점잖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질문ㆍ답변의 내용이나 순서가 거의 비슷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은 학생들은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①선생님은 저같은 아이가 있습니까.
②남조선에는 이렇게 좋은 궁전이 있습니까.
③돈이 많이 든다고 하는데 월급은 얼마입니까라고.
수예실의 한 학생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습니까』라고 물었다.
『박사로 키우고 싶다』고 하자 그 학생은 『기왕이면 분단된 조국보다는 통일된 땅에서 박사로 키우는 게 낫지 않습니까』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친한 게 잘못이냐”
중년의 사람들과도 첫 인사를 나누어 봐도 나오는 질문이 거의 같았다.
그것은 바로 『림수경학생이 왜 감옥에 있디요』라는 고정메뉴였다.
질문처럼 그들의 답변내용도 거의 같다.
특히 북한의 일본 수교움직임을 물어보면 특히 그랬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배상까지 한다기에 이웃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데 뭐가 잘못됐느냐는 것이다.
○“일서 배상은 당연”
로동신문사의 정치담당 편집원인 리연재씨는 『일본이 36년간 조선민족을 착취한데다가 해방후에도 조선전쟁으로 인해 득을 봤으니 일제 36년뿐 아니라 해방후 45년간의 기간도 배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전에 대한 답변도 대부분 일치했다. 인민군은 미군의 북침에 저항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남조선 사람도 죽거나 다친 사람이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담당안내원과 평양으로 가는 열차안에서 만난 북한기자 김모씨의 견해가 이같이 동일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니 북한에서 「변화」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회의가 갔다.
북한 사람들도 『북조선이 변화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영도에 따라 일관성있게 사업을 조직해 왔다』는 말 뿐이지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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