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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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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영익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영익 정치에디터

한영익 정치에디터

매너(manner)는 라틴어(Manusarius)에서 유래한 말이다. 마누스(Manus·손)와 아리우스(Arius·방법)의 합성어다. 오래된 조어인 만큼, 현세에 통용되는 예의범절이라기 보단 겉으로 나타나는 습관, 몸가짐을 일컫는 말로 추정된다.

고대 그리스 남성들 사이에선 손바닥을 보이거나 팔을 들어 올리는 게 유약함의 증거로 여겨졌다. 매너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반면 19세기 유럽에서는 정반대로 ‘나는 무기를 숨기고 있지 않다’고 증명하는 제스처, 악수가 인사의 상징이 됐다. 문명이 진화할수록 통용되는 매너의 종류가 변화해온 것이다.

현재 서양식 식사 예절의 한 축을 차지하는 포크 역시 중세 유럽에서는 금기시됐다. ‘악마의 삼지창’을 닮았다는 종교적 이유에서였다. 그리스와 중동에서 애용되던 포크가 알음알음 유럽에 전해졌을 때도 사람들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근대화가 시작된 18세기 이후에야 포크는 유럽 식탁을 점령했다.

이후 매너에는 공적 의미도 부여됐다. 20세기 독일 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아스는 저서 『매너의 역사』에서 “매너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정의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는 영화 ‘킹스맨’의 유명 대사 역시 사회적 의미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그래서일까. 근·현대사에서 정치 지도자들의 매너가 결정적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1941년 백악관을 방문한 처칠은 목욕한 뒤 나체로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루스벨트가 매너 없이 불쑥 들어왔다가 알몸을 보고 “실례했다”며 나가려 했지만, 처칠은 “보다시피 나는 당신에게 숨기는 것이 없소”라며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응대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이 절실했던 영국 입장에서는 처칠의 순발력 있는 대화 매너가 외교적 역할을 한 셈이 됐다.

대선을 코앞에 둔 한국에서도 매너 논쟁이 벌어졌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기차 좌석에 구둣발을 올린 걸 두고 여당이 공격하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8년 전 식당에서 흡연한 사진을 끄집어내 야당은 역공에 나섰다. 유권자들로선 한숨 나오는 장면이다. 80년 전 처칠의 위트 있는 대화 매너를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국민에 대한 매너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