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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회색 코뿔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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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사회에디터

장주영 사회에디터

세계정책연구소(WPI) 소장인 미셸 부커는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회색 코뿔소(gray rhino)’란 개념을 제시했다. 위험의 징조가 지속해서 나타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코뿔소는 3m가 넘는 길이에 2t이 넘는 육중한 무게를 자랑한다. 그러니 코뿔소가 다가온다면 누구나 땅의 울림을 듣고 느낄 수 있다. 부커는 회색 코뿔소의 대표 사례로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들었다.

한국의 연금개혁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국민연금이 현 제도를 유지할 경우 2039년이면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로 돌아선다. 740조원 기금마저 2055년이면 바닥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 13일 “2055년에 수령자격이 생기는 1990년생부터는 연금을 한 푼도 못 받을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정부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전망이지만, 그만큼 연금개혁이 필요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렇듯 절박한 상황이지만 연금개혁은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정권이 시작할 때 ‘해보겠다’고 했다가 ‘해봤는데 안 되더라’로 끝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당시 소득대체율을 2028년까지 40%까지 줄인 이후 국민연금 개혁은 15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해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미래세대에 부담을 떠넘기지 않으려면 연금개혁은 가야만 하는 길이다.

지난 3일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국민연금 개혁은 누가 돼도 하겠다, 공동선언을 하는 게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좋은 의견”이라고 했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안 할 수가 없으니까 약속을 하자”고 답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도 웃음으로 동의했다. 즉석 합의에 가까웠지만, 표에 도움되는 퍼주기 공약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더 내고 덜 받는’ 연금개혁을 약속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후속 조치로 각 후보가 방법과 시기 등 연금개혁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내놓길 기대한다. 연금개혁은 ‘그렇게 하십시다’는 선언적 합의로 어물쩍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지를 흔드는 진동이 느껴진 지 오래다. 맹렬히 돌진해오는 회색 코뿔소와 만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