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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시각각

'소액 매수 가능자'된 젊은 유권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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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현재의 국민연금 체제가 유지되면 2055년에는 기금 고갈로 이 때 연금 수령 자격이 생기는 1990년생은 국민연금을 한 푼도 못받을 수도 있다. 사진은 지난달 20일 서울 국민연금공단 송파지사 상담 창구의 모습. [연합뉴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현재의 국민연금 체제가 유지되면 2055년에는 기금 고갈로 이 때 연금 수령 자격이 생기는 1990년생은 국민연금을 한 푼도 못받을 수도 있다. 사진은 지난달 20일 서울 국민연금공단 송파지사 상담 창구의 모습. [연합뉴스]

 다시 돌아온 ‘아무 말 대잔치’ 시즌이다. 대선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된 지도 오래. 내거는 쪽은 일단 지르고 보자는 마음으로, 듣는 쪽은 어차피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 접고 넘어가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청년층 표심을 잡으려는 각종 정책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몰염치란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다. 가장 눈에 걸리는 건 각종 현금성 지원 정책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2023년부터 만 19~29세 청년에게 연 100만원 지급을 약속했다. ‘소확행 공약 시리즈’에는 평균 48만원 정도로 알려진 면접준비금을 지원하는 면접수당과 휴대전화 안심데이터 무료 제공 등도 포함됐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취약 청년층에게 월 50만원씩 최장 8개월 지원하는 ‘청년도약보장금’을 약속했다. 소득이 있는 청년에게는 10년 만기로 연간 250만원 한도로 납입액의 15~25%를 국가가 보조하는 ‘청년도약계좌’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청년층을 도와주는 것, 좋다. 그렇지만 뭔가 찜찜하다. 이런 공약들이 청년층의 표를 돈으로 사겠다고 달려드는 듯해서다. 조금 과장하면 매표인 셈이다. 게다가 소확행이란 포장지를 씌운 건 소액 매수의 다른 말로 비친다.

 일상의 작지만 성취하기 쉬운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小確幸)’은 한국적 상황에서는 자조적이며 다소 서글픈 말이다. 취업이나 결혼, 주택 구입 등 크지만 성취하기에는 불확실한 행복을 좇기보다 작고 확실한 행복을 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확행에 방점을 찍는 건 마치 푼돈을 쥐여주고 대충 만족하며 살라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더 문제인 건 청년층에게 선심 쓰듯 베푸는 공약이 미래 세대인 이들의 돈을 당겨 쓰는 것이란 사실이다. 각종 현금성 정책에 들어가는 돈은 세금을 더 거두거나 국채 발행 등으로 빚을 내 마련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청년층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다.

나랏빚 늘고 연금 곳간 비는데
청년층 겨냥 선심성 정책 남발
‘세대 간 도적질’에 앞장서는 셈

 정부의 통 큰 씀씀이에 이미 나랏빚은 버거울 정도로 늘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국가채무는 1075조7000억원으로, 사상 처음 1000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 5년간 나랏빚은 415조원 늘었다. 그런데도 이재명 후보는 당선되면 50조원가량의 긴급재정명령을 발동해 코로나 피해 지원에 나서겠다고 한다.

 빚만 는 게 아니다. 미래 세대와 나눠 써야 할 곳간도 속속 비어가고 있다. 보장성을 강화한 ‘문재인 케어’로 건강보험은 2025년 적자로 돌아설 전망이다. 국민연금도 빨간불이 켜졌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현행 체제가 유지되면 2055년에 적립금은 완전히 고갈된다. 이때 연금 수령 자격이 생기는 1990년생은 국민연금을 한 푼도 못 받을 수 있다.

 만약 현재의 소득대체율(40%)을 유지하면서 그해 거둔 보험료로 국민연금을 지급하는 방식(부과 방식)으로 바꾼다면 미래 세대는 소득의 32%를 연금보험료로 내야 한다는 게 국회예산정책처의 예상이다.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는 소득의 9%(직장인은 회사와 절반씩 부담)를 보험료로 낸다.

 상황이 이런데도 대선후보들은 국민연금 제도 개편에는 미온적이다. 적자를 향해 내달리는 건강보험에는 탈모 치료 적용이라는 또 다른 부담까지 안길 태세다. 후보 간 돈줄 풀기 경쟁은 고조되고 있다. 이른바 ‘세대 간 도적질’에 후보들이 앞장선 모양새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는 저서 『불평등의 세대』에서 ‘한국 사회는 다음 세대를 위한 기본적인 배려도 결여한 사회가 돼 가고 있다. 그 폐해가 봇물이 돼 쏟아지고 있고, 그 미래 비용은 천문학적 숫자가 돼 우리에게, 아니 다음 세대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막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선심성 공약만 남발한다면 ‘젊은 유권자=소액 매수 가능자’로 여긴다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하현옥 금융팀장

하현옥 금융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