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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누가 중국의 문화공정을 부추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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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4일 오후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한복을 입은 조선족 여성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4일 오후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한복을 입은 조선족 여성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14년 전에도 똑같은 장면이 등장했다.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형 중국 국기를 게양대로 옮기는 행렬 속에 한복 차림의 소녀가 있었다. 중국 국가를 제창하는 성인 합창단 속에도 한복 입은 조선족 여성이 포함돼 있었다. 사실 한복 차림의 조선족 여성은 중국 주요 행사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매년 3월 초 열리는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와 함께 열리는 정협(정치협상회의) 개ㆍ폐막식에도 조선족 대표는 한복을 입고 참석한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1949년 신중국, 즉 공산당 정권이 수립될 때부터 확립된 전통이자 법적 근거를 가진 제도다. 너무 소액이라 시중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중국 화폐 2자오(약 38원)권에는 한복 입은 여성이 투자(土家)족 여성과 나란히 그려져 있다.
들끓는 국내 여론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논란은 그 자체만으로는 외교 문제화하기에 곤란한 면이 있다. 중국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나머지 55개 민족이 다 나오는데 조선족만 빠지면 차별 또는 탄압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조선족에게 한복 아닌 다른 옷을 입고 나오게 하란 말인가.”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소수민족은 하나의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경우를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에 맞지 않는 말이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에는 러시아족, 몽고족, 카자흐족, 우즈베크족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엉터리 인식으로 설령 항의를 한들 중국 사람들이 귀담아들을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이번 논란을 일회성 해프닝에 대한 한국인의 과민반응으로만 치부하는 것도 곤란하다. 핵심은 한복 논란 자체보다는 비등점 가까이 끓어오른 반중 감정이 실체를 드러냈다는 사실에 있다. 2008년엔 같은 장면에 잠잠하던 여론이 왜 지금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는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반중 감정의 원인 제공자는 중국이다. 첫 계기는 사드 보복이었다. 중국 112곳에서 영업 중이던 롯데마트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명동과 제주도를 활보하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스스로 대국이라 칭하는 중국의 협량(狹量)을 한국인들은 똑똑히 보았다. 뒤이어 ‘문화공정’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자국 절임식품인 파오차이가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등록되자 관영 매체는 “한국이 김치 종주국이란 주장은 유명무실하게 됐다”고 썼다. 중국 각급 연구기관의 성과를 바탕으로 작성되는 포털 백과사전은 한복·김치·온돌 등 의식주 전 분야에 걸쳐 중국 기원론을 끼워 넣었다. 모두 다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건드리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저자세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황희 장관이 “싸우자고 덤벼서 얻는 실익이 뭐냐”고 한 건 관련 부처 장관으로서 극히 무책임한 발언이다. 일일이 맞싸움을 걸자는 얘기가 아니다. 선제적으로 정부가 할 일을 하지 못하고서는 뒤늦게 ‘실익’ 운운하는 게 더 큰 문제란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김치의 종주국이 한국이란 인식은 굳건하다. 그렇다면 한국 주도하에 국제적 인증제도를 만들어 종주국의 위상을 굳히고 중국이 딴소리를 못 하게 만드는 게 정부 역할 아닌가. 그런 노력은커녕 사후 항의조차 안 하는 사이에 중국의 문화공정이 야금야금 진행됐고, 그에 비례해 반중 감정은 높아져 갔다. “중국은 높은 산”이라고 추켜세운 문재인 정부의 대중 저자세에 대한 반감이 반중 감정과 상승작용을 일으킨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 대상이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특정 국가를 향한 국민 감정이 극도로 악화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국내 정치에 휘둘리기 쉬운 대외정책을 더욱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한국 국민의 뿌리 깊은 반일 감정과 586세대 운동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미 감정, 여기에 최근의 반중 감정까지 보태졌다. 대외 교역과 국제 협력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격 아닌가.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한복 논란으로 표출된 반중감정 #정부의 대중 저자세가 부채질 #고립 자초하는 반미ㆍ반일ㆍ반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