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승자의 단어. 무서운 말이죠" 선거판 여우 된 이선균·설경구

중앙일보

입력 2022.01.25 11:29

업데이트 2022.01.29 22:18

1970년 신민당 대통령 경선 이후 고 김대중 대통령과 그를 도운 선거 전략가 엄창록의 실화가 토대인 영화 '킹메이커'에서 각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주인공 김운범(오른쪽, 설경구)과 참모 서창대(이선균). 극중 두 인물의 운명이 엇갈릴수록 화면 속 빛과 그림자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1970년 신민당 대통령 경선 이후 고 김대중 대통령과 그를 도운 선거 전략가 엄창록의 실화가 토대인 영화 '킹메이커'에서 각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주인공 김운범(오른쪽, 설경구)과 참모 서창대(이선균). 극중 두 인물의 운명이 엇갈릴수록 화면 속 빛과 그림자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극중 공화당 선거전략가 이 실장(조우진)이 이런 대사를 해요. ‘당신이 김운범이 대의를 믿었듯이 저도 각하의 대의를 믿습니다.’ ‘정의라는 게 원래 승자의 단어 아닙니까’. 무서운 말이죠. 서로 인정 안 하지만 각 진영마다 대의가 있고 그걸 정의로 만들기 위해 대립하는 과정이 선거인 것 같아요.”(설경구)

“출신지로 차별받은 게 트라우마가 된 주인공 서창대가 오히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네거티브 전략을 만드는 배후가 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죠.”(이선균)

1970년대 선거판을 되짚은 영화 ‘킹메이커’(감독 변성현) 주연 배우 설경구(55)‧이선균(47)의 말이다. 지난달 29일 개봉하려던 영화는 코로나19 재확산에 설을 앞둔 26일로 일정을 늦추며 오는 3월 대통령 선거와 가까워졌다. 화상 인터뷰로 18일 만난 설경구는 “완성을 2년 전에 했는데 코로나로 개봉 시기를 잡지 못했다”고, 14일 먼저 만난 이선균도 “정치 영화라기보다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 설명했다. 하지만 정치와 선거의 본질을 곱씹게 만드는 장면과 대사가 많다. 왕을 만드는 자란 뜻의 영화 제목부터 그렇다.

'불한당: 나쁜놈들의 세상' 변성현 감독과 '킹메이커'로 다시 뭉친 배우 설경구를 18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엄]

'불한당: 나쁜놈들의 세상' 변성현 감독과 '킹메이커'로 다시 뭉친 배우 설경구를 18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엄]

영화는 1970년 야당이었던 신민당 대통령 경선을 전후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막판 뒤집기승을 이끈 참모이자 네거티브 전술의 귀재 엄창록의 실화가 토대다. 두 사람을 모델로 한 정치인 김운범(설경구)과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가 1961년 강원도 인제 선거 때 처음 만나 첫 승리를 거둔 뒤 1971년 김운범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된 시절까지 10년간을 집중해서 다룬다. 설경구와 ‘불한당: 나쁜놈들의 세상’(2017)으로 칸영화제 심야상영 부문에 초청됐던 변성현 감독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신민당 젊은 기수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 등이 얽힌 정치판 실화에 상상을 보태 각본까지 썼다.

26일 개봉 선거 영화 '킹메이커'
1970년대 야당 대선후보 된 설경구
네거티브 전략 귀재인 참모 이선균
"정의란 승자의 단어. 무서운 대사죠"

'선거판의 여우' 그 남자, 왜 국민들은 잘 몰랐을까

“옳다고 믿는 목적을 위해 옳지 않은 수단이 정당한가.” 변 감독이 넓게 펼친 주제 위에 배우들은 노련한 연기로 살아 숨 쉬는 인물을 새겨냈다. 급변하는 정치 상황과 당대 분위기를 정교하게 되살린 미술‧세트도 몰입을 거든다. 전반부가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숨 가쁘게 좇는다면 후반은 이선균의 감정연기가 관객을 빨아들인다. ‘기생충’(2019) 때보다 더 정밀한 연기 톤이다. 차별 없는 세상으로 바꿔보자며 뭉쳤지만 김운범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서창대의 상실감이 매 장면 짙은 빛과 그림자로 대비된다.

영화 '킹메이커'에서 선거 전략가 서창대로 변신한 이선균을 14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영화 '킹메이커'에서 선거 전략가 서창대로 변신한 이선균을 14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이선균은 “엄창록은 알려진 게 많지 않은 인물이다. 이북 출신이란 것도 정확한 기록은 아니고 풍문”이라며 “변 감독과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다른 정치가들 자서전에 이름이 나올 만큼 ‘선거판의 귀재’ ‘선거판의 여우’라고 하는데 왜 국민은 모를까. 이 양반이 왜 정면에 나서지 못했을지 감독님과 함께 만들어갔다”고 했다. 영화에서 서창대는 “똑똑하고 통찰력이 있지만 어린 시절 이북 출신인 탓에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죽는 것을 목격한 트라우마가 있다”(이선균)는 설정. 이선균은 “(후일담 장면까지) 20~60대에 걸쳐 연기해야 하고 시대에 맞는 톤을 찾는 게 숙제였다”고 했다. 특히 서창대가 처음 김운범의 선거본부에 나타나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은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장면들의 부담이 컸다고. “감독님과 의논해 바닥에 드러눕는 쇼맨십부터 말할 때 다른 사람과의 거리감, 속도감, 대사 높낮이까지 연극처럼 동선을 체크하며 만들어갔다”고 그는 돌이켰다.

설경구 "'김대중'이던 배역 이름, 부담 커 바꾸자 했죠"

설경구는 ‘불한당’ 때 이 영화 대본을 동시에 받았단다. 당시 대본은 배역 이름이 ‘김대중’이었다. 설경구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감독님한테 바꿔 달라고 했다. 원래 이름이었다면 연기도 실존 인물을 모사하려 했을 텐데 바뀌면서 캐릭터도 중간지점을 찾았다”고 했다.

영화에선 신민당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을 토대로 한 정치인 김운범(가운데, 설경구)뿐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 모델의 야당 의원 김영호(왼쪽, 유재명) 등 실존 인물 토대의 캐릭터들이 당시 엎치락뒤치락하던 대통령 경선의 열기를 긴장감 넘치게 긴되살려낸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영화에선 신민당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을 토대로 한 정치인 김운범(가운데, 설경구)뿐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 모델의 야당 의원 김영호(왼쪽, 유재명) 등 실존 인물 토대의 캐릭터들이 당시 엎치락뒤치락하던 대통령 경선의 열기를 긴장감 넘치게 긴되살려낸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지난해 개봉한 ‘자산어보’의 조선 학자 정약전, 영화 ‘나의 독재자’(2014) 속 김일성 대역 배우 등 실존 인물을 빼닮은 연기도 여러 번 도전했던 그다. 이런 전작 속 인물들은 정보가 많지 않아 오히려 자유롭게 연기했다면 이번 역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모두가 아는 근현대사 인물이어서 부담감이 컸다”고 했다. “연설할 때 톤도 우리가 익숙하잖나. 1970년대 당시 동영상도 봤지만 흉내 내기보단 김운범이란 인물에 집중했다”면서 “목포 사투리도 열심히 공부해 지역 냄새만 살짝 풍길 정도로만 걷어냈다”고 했다.
평소 “개인보다 진영 논리가 우선인 정치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김운범 역을 여러 의미로 피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운범이란 캐릭터가 굉장히 외롭다. 영화를 보면 주도적으로 뭘 하는 것 같지만, 연설 빼곤 강렬한 대사가 없다. (서창대를 위해) 큰 판을 깔아주는 캐릭터지 감정의 기복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며 “변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연기했다”고 했다.

이창동의 설경구VS변성현의 설경구 

이선균은 촬영 내내 극중 정치가 김운범(설경구)의 선거 벽보를 집에 붙여놨다고 했다. “서창대의 마음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이선균은 촬영 내내 극중 정치가 김운범(설경구)의 선거 벽보를 집에 붙여놨다고 했다. “서창대의 마음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변 감독과의 전작 ‘불한당’은 관객 수는 100만이 채 안 됐지만, 공동 주연 임시완과의 뜨거운 감정선이 자칭 ‘불한당원’이란 열혈팬을 양산하며 그를 ‘지천명 아이돌’로 부상시켰다. 당시 슬럼프를 겪던 설경구를 스타일리시한 액션 누아르의 주인공으로 변신시킨 변 감독이 “구겨진 설경구 선배를 빳빳하게 펴고 싶었다”고 했던 말도 화제였다.
데뷔 초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 등 이창동 감독의 사실적인 영화로 출발한 설경구는 “변성현 감독을 만나 ‘영화적인’ 재미도 알게 됐다”면서 “제 생각과 반대의 해석을 줄 때가 있다. 같은 감정인데 한번 꺾는다고 해야 하나. 변 감독과 다음 작품(넷플릭스 영화 ‘길복순’)까지 세 편을 함께 하며 ‘아’ 할 때가 많다”고 했다. “‘불한당’ 초반엔 많이 부딪혔죠. 변 감독이 만화적으로 풀려고 한 걸 이해하는 데에 오래 걸렸죠. 이게 사실이 아니니까. 근데 지금은 너무 이해해버려서 오히려 고민이에요. (웃음) 영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죠. 그러나 연기의 기본은 놓치지 않죠. 이창동 감독님, 한양대 연극영화과 최형인 선생님, 극단 학전 김민기 선생님이 늘 하신 말씀이죠. ‘연기하(려 하)지 말라.’”

이선균 "경구 형 리스펙" 설경구는 "이선균 쿨해"

영화에서 서창대가 시대에 따라 바꿔 끼는 안경은 실제 모델 엄창록씨의 사진 속 안경 쓴 모습을 토대로 상상을 더해 연출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영화에서 서창대가 시대에 따라 바꿔 끼는 안경은 실제 모델 엄창록씨의 사진 속 안경 쓴 모습을 토대로 상상을 더해 연출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배우 경력이 20년을 훌쩍 넘는 설경구‧이선균이 처음 함께한 작품이란 것도 ‘킹메이커’의 볼거리다. 이선균은 설경구가 데뷔 초부터 ‘롤모델’이라 밝혔다. “저한테 영향을 줬던 작품 안에 경구 형이 굉장히 많아요. 어릴 때 연극 전공한다고 1994년 대학로 가서 ‘지하철 1호선’ 초연 때 경구 형을 보며 2시간이 행복했죠. 이창동 감독 영화의 모습도 쇼킹했고. 저런 연기하고 싶다, 하는 가이드가 돼주신 것 같아요. 리스펙합니다.” 설경구는 “저는 기억을 못 했는데 이선균 씨가 제가 연극할 때 포스터 붙이는 것도 봤다더라”고 돌이켰다. “저는 이선균씨를 공연 뒤풀이 때 만났는데 같이한 배우마다 그를 욕하는 걸 들은 적이 없어요. 실제로 보니 사람 자체가 쿨하고 흔들림 없더군요. 자기 자리를 딱 지키는 게 있어요. 같이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배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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