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제1외국어로 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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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영국 시골의 오두막집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15세 소년 딕슨은 너무 배가 고파 왕이 기르는 사슴을 활로 쏘아 잡았으나 겁이 나 로빈후드에게로 달아났다.」
콜로라도 주에 사는 짐은 6개월 째 실업자신세다. 주급 8달러의 직장은 있지만 그나마 5달러를 받고 일하는 사람을 밀어내고 들어가야 되는 바람에 이것도 포기한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다 결국 체제가 잘못됐음을 깨닫고「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 친구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이상은 북한의 고등중학교(우리의 중학교)2학년 영어교과서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다. 북한에서 영어를 각급 학교 정규교육과정에 포함시킨 것은 84년 이후.
당시까지 제1외국어는 러시아어였으나 지금은 영어가 제1외국어 선택으로 등장할 만큼 인기과목이다.
북한의 중학교2학년 영어교과서를 통해 본 북한의 영어교육은 의식적으로「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강조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영어교과서에 등장하는 외국은 미국·영국·스페인 정도.
그나마 대부분은 영국을 무대로 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나라의 생활상소개 또한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측면에 집중된 것이 특색이다.
제2과에 나오는「딕슨 달아나다」에서는 8백년 전 영국의 봉건제도 아래에서 15세의 소년 딕슨이 가난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배가 고파 왕의 재산인 사슴을 사냥한 뒤 로빈후드의 산채로 달아나는 옛이야기로 봉건시대의 착취에 시달리는 농노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5과와 6과의「데이비드 달아나다」에서는 의붓아버지와 함께 사는 데이비드 소년이 공장에서 아무리 일해도 고생을 면하지 못하고 결국은 런던의 이모를 찾아간다는 내용.
이과에서는 그러나 시대나 장소 등 이 구체화되어 있지 않아 영국사회가 현재까지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23과「어린이노동」에서도 공장노동자인 찰스가 일요일마다 틈틈이 책을 읽는 등 향학열을 불태우지만 일이 너무 고되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내용.
미국사회에 대한 묘사도 예외는 아니어서「보통사람」이라는 12과에서 콜로라도에 사는 실업자 카터가 아무리 노력해도 취직 못해 결국「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실업자의 이름은 또「짐 카터」여서「지미 카터」전 미국대통령을 은연중에 연상시킨다.
이처럼 서구사회를 노동자가 신음하는 사회로 묘사한 것은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 및 자본주의를 적으로 보고 이들 사회의 발전상을 감추려는 북한당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주제로 한 내용은 3개 과에 지나지 않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8과에서는「고슴도치가 따가운 자신의 가시로 호랑이를 물리쳤다」는 우화를 이용해「위대한 지도자」가『노동당을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면 작은 나라라도 외적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다른 아이와 평등하게」라는 14과에서는 김정일이「지도자의 아들」임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으며 어린 나이에도 비범하게 행동했다는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과에서는 김정일이 가방대신 책 보따리를 둘러메고 다니는데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자『인민 모두가 가방을 갖고 다닐 때 나도 갖고 다니겠다 』고 한 것과 학급에서 청소당번을 빼 주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자진해 청소를 하는 모범 성을 통해 평등을 실현시켰다고 설명하면서 김정일의「어딘가 남과 다른 성숙된 모습」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또 마지막 과인 25과「북한에 대한 나의 인상」에서는 한국전쟁 종군기자였던 방문객의 입을 빌려 발전된 북한모습, 김일성의 지도력을 극구 칭찬하고 있다.
이 방문객은「제국주의 미국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북조선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지도 하에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고 했고「사람들은 잘먹고 잘살고 있었으며 발전된 모습은 낙원과 같다」고 칭송했다.
또『양키만 남한에서 물러나면 남한인민은 행복하게 될 것』이라며「위대한 지도자의 만수무강」「노동당의 번영」「혁명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김정일은 이 교과서에서 한과에 걸쳐 설명돼 김일성보다 더 대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이는 김정일이「다음세대의 지도자」라는 점을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김일성·김정일의 이름은 다른 인쇄물에서처럼 고딕활자로 인쇄됐고 지도자 김일성의 말은 발언전체를 고딕활자로 인쇄하는 등 특별취급을 하고 있다.
자주성·주체 등의 용어를 발음 그대로 영문 표기한 것도 눈에 띈다.
이밖에 이 교과서는 서구의 문물은 거의 소개하지 않고 유일하게 피카소만을 등장시키고 있다.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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