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서울 청담동. 인터뷰를 앞두고 자신의 사무실에 먼저 도착해있던 배우 차인표는 얇은 책을 한 권 읽고 있었다. 제목은 『이라크의 역사』.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와 연관이 있어서 보고 있다”고 했다.
2009년 냈던 첫 소설 다시 낸 배우 차인표 인터뷰 #"소설 쓸 때 완전한 자유로움 느낀다. 운명처럼 쓰겠다" #코로나 시국 2년동안 장편 완성, 새로운 장편도 쓰는 중
차인표의 첫 소설이 다시 나왔다. 2009년 냈던 장편『잘가요 언덕』이 지난달 새로운 제목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으로 복간돼 다시 출판됐다. 백두산 자락의 한 마을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징집됐던 ‘순이’의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서울 출생. 소설가이자 독서광 그리고 29년 차 배우. (중략) 구전 설화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한국형 판타지 시리즈를 기획 집필 중이다.”
차인표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글쓰기가 내 운명인 것처럼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하루에 4~5시간씩 꼭 앉아 2500자씩 쓴다.” 코로나 19 이후 거의 2년 동안 이 규칙을 지켰다. “2500자를 쓰고, 다음 날 2000자를 지워버리는” 일을 반복한 끝에 장편 소설 한 편의 초고를 마쳤고, 그다음 장편을 시작했다고 했다. 차인표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쓸까. 무엇을 쓰고 있을까. 다음은 일문일답.
- 첫 소설이 13년 만에 복간됐다.
“출간 6년 후 절판 결정을 내가 내렸다. 11세이던 아들을 위해 쓴 책이었다. 위안부의 아픈 역사를 숫자가 아닌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아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읽는 사람도 별로 없고 책이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미안해서 절판을 결정했다가 이번에 새로운 출판사의 제안으로 복간했다.”
- 다시 나온 책이 작심하고 소설을 내겠다는 신호탄처럼 보인다.
“2011년 두 번째 장편 『오늘예보』를 낼 때까지도 죄책감이 있었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것도 아니고, 유명인이기 때문에 작품을 쉽게 발표할 수 있었다. 작품이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나 검열을 하다 보니 꾸준히 글을 못 썼다. 그러다 코로나 시대가 되면서 글쓰기에 집중하게 됐다. 많이 읽고 많이 썼다.”
- ‘연예인 소설’이라는 한계가 짐이 됐다는 뜻인가.
“내 소설은 당시 그룹 빅뱅의 화보집, 또 어느 여배우의 뷰티 책과 함께 묶여 소개되더라. 연예인이라 쉽게 출판한 건 맞지만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결국 많이 쓰는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소설을 써야 소설가로 보지 않겠나.”
- 어떤 작품을 어떻게 쓰고 있나.
“이번엔 좀 다른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직전 조선의 인어(人魚)다. 민담이나 설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아픔을 반영한다. 나는 인어의 설화에서 인간들의 욕망과 그 충돌을 발견했다. 특히 독도에 수만 마리가 살았다가 포획으로 멸종된 강치(물갯과 동물)의 역사와 엮으며 인간의 욕망과 슬픔을 연결했다.”
- 자리 잡은 배우이면서 기부와 나눔의 메시지를 전하는 유명 인사다. 소설 쓰기를 사명처럼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로움 때문이다.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읽고, 생각하고, 편집하고, 창작하는 순간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중국 집안(集安)의 국내성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고구려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 또 다른 사람들은 축조법을 궁금해한다. 나는 그걸 지을 때 동원됐을 수십만명을 떠올린다. 해자를 파다 죽었을 수 있는 하층민,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 마음을 이해해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진다.”
- 배우로서 연기하며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자유로움 말고 다른 감정을 느끼나. 어떻게 다른가.
“영화나 드라마의 핵심은 공동 작업이다. 이야기를 만들고 투자받고 스태프들이 모여 수많은 역할을 나눈다. 배우는 퍼즐의 한 조각이다. 반면에 글쓰기는 퍼즐 자체의 판을 짠다. 그 판이 훨씬 작고 인기가 없더라도 내가 온전히 구성을 담당한다는 자유로움이 엄청나다.”
- 글쓰기를 배운 적은 없다. 독학인가.
“맞다. 지식의 접근 방식이 완전히 변화했다. 영국 옥스퍼드, 미국 예일대의 소설 강좌를 영상으로 누구나 볼 수 있다. 매일 운동할 때 두시간씩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이런 강의를 듣는다.”
- 새로운 작품은 언제 볼 수 있나.
“구체적으로는 모른다. 소설가로서 새싹이라 죽지 않고 나무가 되는 게 목표다. 다만 내년에 56세다. 늦게 시작한 만큼 일 년에 두편쯤 발표하고 싶다. 그렇게 5년 정도 하면 스스로 ‘내 직업이 소설가’라고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연기자 차인표는 계속 볼 수 있나.
“물론 주연이 들어오면 연기에 집중해 몇달 동안 아무것도 못한다. 그런 감안은 해야겠지만…. 계속 나를 부를까? 모르겠다. 이제 목표는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거다. 글쓰기가 제일 자유롭고 행복하니 더 나이 들어서 직업은 소설가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