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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용 “종전선언 합의” 발언, 확인 안한 美…“대북외교 전념” 동문서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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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 29일 내신기자 간담회에서 한미 간 종전선언 협의 경과와 관련 "문안에 관해 사실상 합의된 상태"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 29일 내신기자 간담회에서 한미 간 종전선언 협의 경과와 관련 "문안에 관해 사실상 합의된 상태"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29일 “한·미 간 (종전선언) 문안에 관해 사실상 합의된 상태”라고 말했지만, 미국 측은 이를 확인하지 않은 채 "대북 외교에 전념한다"는 원론적 입장만 내놨다. 북측의 호응이 없는 데다 워싱턴 조야에서 종전선언의 파급효과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은 점 등을 의식한 것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한·미 간 종전선언 문안 합의 여부를 묻는 중앙일보 질의에 29일(현지시간) “북한과의 대화·외교를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달성하는 데 계속 전념하고 있다”고 답했다. 종전선언 문안이 합의됐다는 정 장관의 발언이 맞느냐는 질문에 사실상 답을 피한 채 대북정책 원칙론을 소개하는 동문서답에 가까웠다.

프라이스 대변인은 “조정되고 실용적인 접근 방식의 일환으로 대북 관여를 지속해서 모색하겠다”고도 했다. 북한에 대한 기존의 국무부 입장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이런 입장은 종전선언에만 국한됐던 것도 아니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30일 정례브리핑에서 종전선언과 관련한 한·미 온도차가 느껴지는 데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한·미 양국은 그간 종전선언 추진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 아래 종전선언 문안에 대해 이미 사실상 합의에 이른 상태”라는 점을 강조하며 “다만 구체적인 종전선언 추진방안에 대해서는 계속 협의 중에 있다”고 말했다.

韓 "상당한 조율" "사실상 합의", 美 침묵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수차례에 걸쳐 종전선언을 둘러싼 한미 간 이견이 해소됐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미 국무부 측에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말을 아끼고 있다. 사진은 정례브리핑에 나선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 [AFP=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수차례에 걸쳐 종전선언을 둘러싼 한미 간 이견이 해소됐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미 국무부 측에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말을 아끼고 있다. 사진은 정례브리핑에 나선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 [AFP=연합뉴스]

미 국무부는 지난달 11일 정 장관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미 간 (종전선언 관련) 상당히 조율이 끝났다”고 말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프라이스 대변인은 당시에도 “북한과의 대화·외교를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달성하는 데 계속 전념하고 있다”는 이번과 똑같은 입장을 소개했다

정 장관은 “상당한 조율” “사실상 합의” 등 점차 표현 수위를 높여가며 한·미의 종전선언 공조를 강조하고 있는데, 미국은 이견 조율 및 문안 합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기계적인 답변만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지난달 종전선언 관련 프라이스 대변인의 답변엔 ▶북한과 전제조건 없이 만날 준비가 돼 있고 ▶북한과의 관여를 위해 한·일 등 동맹국과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 등의 내용이 담겼으나 이번엔 이마저도 생략됐다. 또 상대국 고위급 인사의 발언을 평가하거나 직접적인 입장 표명이 어려울 경우 사용하는 “사적인 외교 대화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관용적 표현조차 없었다. 종전선언을 둘러싼 한·미 간 협의 상황을 일방적으로 공개하고 낙관론을 펴는 한국에 대해 미 국무부의 피로감이 쌓인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민주당·공화당 여전한 종전선언 '이견'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화약고'가 될 수 있는 종전선언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는 분위기다.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화약고'가 될 수 있는 종전선언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는 분위기다. [AFP=연합뉴스]

현재 미 의회 내에서도 종전선언에 대한 확실한 지지는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바이든 행정부 입장에선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종전선언을 급격하게 진전시키거나 관련 입장을 공식화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종전선언 논의 과정에서 한국은 더 이상 미국의 이견이 나오지 않으니 '합의'라고 평가를 하지만,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그저 청취하고 있을 뿐 이같은 상황을 합의나 동의로 보진 않는 동상이몽에 빠져 있을 수 있다”며 “바이든 행정부는 특히 미 의회 내에서도 종전선언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미 협의 경과나 문안 합의 여부 등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종전선언 협의 경과, 한·미 온도차  

일각에선 정 장관이 “베이징 올림픽을 남북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졌다”고 시인하면서도 한·미 간 종전선언 문안에 합의했다는 내용을 공개한 것은 국내 정치적인 ‘성과 홍보용 메시지’의 성격이 더 커 보인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 장관의 발언은 내신 기자 간담회에서 나왔는데, 질문은 '북한에 종전선언과 관련해 구체적 제안을 할 계획이 있느냐'였지 한·미 간의 협의 경과를 묻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 장관은 지난 11~12일 G7 외교·개발 장관회의에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을 만났을 때 블링컨 장관이 종전선언 문안 합의 사실을 재확인했다는 점까지 언급했다. 미국은 종전선언과 관련해 원론적 입장만 반복하는 가운데 정 장관이 상대국 장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언론에 노출한 셈이다.

지난 11일 G7 외교개발장관 회의에서 회동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두 장관의 만남은 '약식 회동'으로 외교부가 공개한 사진에서도 정 장관과 블링컨 장관은 바 테이블에 기댄 채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외교부 제공]

지난 11일 G7 외교개발장관 회의에서 회동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두 장관의 만남은 '약식 회동'으로 외교부가 공개한 사진에서도 정 장관과 블링컨 장관은 바 테이블에 기댄 채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외교부 제공]

사실 미 국무부는 G7 외교·개발 장관회의 당시 한·미 장관이 만났다는 사실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 측만 보도자료를 냈는데, 한국 외교부도 이를 '약식 회동'으로 표현했다. '약식 회담'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식이었던 셈이다.
또 외교부 보도자료에도 "한·미 장관이 한반도 문제 등 상호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만 돼 있지, 구체적인 발언 내용은 소개하지 않았다. 미 측에서 만남 사실은 물론 일체의 논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측이 블링컨 장관의 발언을 공개한 것 역시 통상적이지는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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