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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국가가 책임지고 ‘존엄한 죽음’ 보장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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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웰다잉문화운동 기획위원장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웰다잉문화운동 기획위원장

신축년(辛丑年)이 저물고 임인년(壬寅年)이 다가오고 있다. 한 해를 돌아보고 삶의 마무리를 한 번쯤 생각하기에 좋은 때다. 2016년 1월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입법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 8월 보건복지부는 ‘사전연명 의료 의향서’ 100만 명 작성을 축하하는 행사를 했다. 하지만 품위 있는 죽음은커녕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이 여전한데도 법 통과 당시의 국민적 기대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65세 이상 노인층의 85.6%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반대하고 국민 절반 이상이 건강할 때 작성할 의향이 있다는데 실제로는 겨우 성인의 2.2%만 참여했기 때문이다.

초고령사회에서 대두된 ‘웰다잉’
호스피스 늘리고 관련법 보완을

지난해 사망자 중 18%만 이 법이 규정한 연명의료 결정 과정을 따랐을 뿐이다. 나머지 82%는 심폐소생술을 받아 연명의료 시행이 늘었는지, 법에 따라 보호받지 못하는 심폐소생술 금지(DNR) 동의서 관행이 여전한지, 이에 대한 통계조차 없다. 웰다잉을 위해 만든 법이 죽음의 의료화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무는 기간을 연장해 오히려 존엄한 죽음을 훼손하고 있을까 두렵다.

법 통과 후 2년간 호스피스 인프라를 확대하기로 했지만, 필요한 2500병상(인구 100만 명당 50병상)의 57%인 1429병상에 불과하다. 호스피스 대상자를 암·후천성면역결핍증(AIDS)·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만성간경화 등 4개 질환으로 제한하는 바람에 다른 질환의 말기 환자들은 이용도 못 한다.

암 이외의 3개 질환으로 호스피스를 이용한 환자도 3년간 60명에 불과했다. 전체 사망자의 6.7%만 호스피스를 이용해 웰다잉의 형평성 문제가 심각하다. 호스피스 전문기관 88곳 중 17곳이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차출되면서 261개 병상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아무리 ‘산 자’를 우선한다지만 말기 환자의 죽음조차 천대받는 사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비극이다. 호스피스 입원 대기자가 2배로 증가해 오갈 데 없는 암 환자들이 응급실에서 사망하는 사례가 늘었다. 정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초고령사회를 앞둔 시점에 실효성 없는 정책 때문에 고독사·간병살인·동반자살이 끊이지 않는다. 국민의 존엄한 죽음에 책임이 있는 국가는 죽음의 현실을 진단하고, 고통받는 말기 환자와 가족들에게 어떤 돌봄을 어떻게 제공해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국민은 호스피스와 연명의료결정 확대와 함께 독거노인 공동부양, 성년 후견인, 장기 기증, 유산 기부, 생애보(生涯報) 작성, 장례 절차 등을 포함한 광의의 웰다잉을 원한다. 이는 ‘의사 조력자살’이나 안락사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에도 많은 국민이 동의했다. 말기 환자의 간병 공동체를 위한 기부 활성화, 웰다잉 문화재단 설립, 입원 환자의 사전연명 의료의향서 확인 절차, 사전돌봄 계획 상담의 건강보험 인정, 호스피스 대상자 확대와 지원 등 웰다잉 정책도 서둘러야 한다.

웰다잉은 남은 삶을 가족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베풀며, 두려움과 고통보다 삶의 완성으로 기억되도록 하자는 취지다. 웰다잉에 대한 국민적 희망을 외면하면 세계적 흐름인 안락사 합법화의 거센 물결에 휩싸일 수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모든 국민의 품위 있는 죽음, 웰다잉에 대한 국가 차원의 책임자다. 미국은 지미 카터 대통령 때부터 매년 11월이면 대통령이 국민의 죽음을 애도하고 유족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호스피스 종사 등 의료인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 메시지를 보낸다. 차기 대선 후보들은 국민의 죽음을 도외시한 전임 대통령들의 전철을 밟지 말고 존엄한 죽음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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