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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화상 회담 못한채 해 넘기는 정부...'연내 종전선언'도 사실상 무산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던 남북 간 비대면 화상 회담이 결국 실현되지 못한 채 해를 넘기게 됐다. 정부 내에선 문 대통령의 '외교적 유산'으로 남북 화상 정상회담을 거쳐 내년 2월 베이징 올림픽에서 종전선언을 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논의됐지만, 연내에는 단초 마련조차 어려워졌다.

김창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본부장이 지난 4월 서울시 종로구 남북회담본부 회담장에서 출입기자단을 상대로 남북 영상회의 시연을 하는 모습. 남북회담본부와 판문점 평화의집 회의장을 연결해 화면에 띄운 모습. 연합뉴스.

김창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본부장이 지난 4월 서울시 종로구 남북회담본부 회담장에서 출입기자단을 상대로 남북 영상회의 시연을 하는 모습. 남북회담본부와 판문점 평화의집 회의장을 연결해 화면에 띄운 모습. 연합뉴스.

"화상 회담하자" 줄곧 제안했지만 무응답

정부는 지난 4월부터 이뤄진 정상 간 친서 교환, 7월 남북 통신 연락선 복원 및 10월 재복원 등 여러 기회에 꾸준히 북측에 화상 회담을 제안했다. 지난 7월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북측에 영상회담 시스템 구축체계를 논의하자고 연락 사무소 채널을 통해 제안했다"고 직접 밝혔다. "이왕이면 대면 회담이 좋지만 방역에 민감한 북한을 회담장으로 유도할 수만 있다면 당장은 비대면도 무방하다"는 게 당시 소식통들의 전언이었다.

통일부 또한 올해 초부터 화상 회담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 4월엔 남북회담본부에서 언론을 상대로 시연회도 열었다. 남북 간 회담은 보안 문제로 직통 광케이블을 이용한 '선 대 선' 방식으로만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평양 혹은 개성 등 북한 내부와 판문점을 잇는 광케이블은 북한에도 이미 깔려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이에 남북 통신 연락선을 통해 한국 측 영상회의 시스템 구축 현황을 우선 알리고 북측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뒤 시험 통화 등을 진행하려 했지만, 아직 북측의 반응은 없다.

北, 정상회담ㆍ종전선언 언급했지만 말뿐

그간 북측 고위급에선 정부가 추진 중인 남북 정상회담 및 종전선언에 대해 다소 전향적 입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역시 말에 그쳤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 9월 담화에서 "공정성과 서로에 대한 존중의 자세가 유지될 때 의의 있는 종전이 때를 잃지 않고 선언되는 것은 물론 북남공동연락 사무소의 재설치, 북남수뇌상봉과 같은 관계 개선의 여러 문제들도 건설적인 논의를 거쳐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종전선언 ▶남북공동연락 사무소 재설치 ▶남북 정상회담을 한꺼번에 언급했다.

이어 같은 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직접 언급하며 선결 조건으로 이중기준과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했다.

정부는 이를 '조건부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정부 당국자들은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이 종전선언에 대한 관심을 직접 표명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북한도 종전선언에 원론적으로 찬성한다는 점을 미국 등을 설득하는 논거로 삼았다.

하지만 북한이 내건 조건은 제재 해제부터 주한미군 철수, 핵 보유국 지위 인정까지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요구로, 종전선언 논의 과정에서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미국의 원칙론적인 입장이 더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진 게 사실이다. 북한이 협상력 제고를 위해 종전선언의 문턱을 높인 게 오히려 운신의 폭을 좁히고 종전선언 실현을 더 어렵게 했다는 반론도 나오는 이유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은 현재 남북 정상회담에 나설 명분도, 회담을 통해 얻을 실익도 없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한ㆍ미가 사실상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건 채로 상황을 지켜보며 긴장 고조의 명분을 쌓다가 벼랑 끝 전술 등으로 국면 전환을 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10주기인 지난 17일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진행된 중앙추모대회에 참석하는 모습. 조선중앙TV.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10주기인 지난 17일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진행된 중앙추모대회에 참석하는 모습. 조선중앙TV. 연합뉴스.

연내 종전선언도 무산...美 내부 신중론 확산

문 대통령이 지난 9월 유엔 총회에서 공식 제안한 남·북·미 혹은 남·북·미·중 종전선언도 해를 넘기게 됐다. 앞서 지난달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한ㆍ미ㆍ일 차관급 협의를 위해 방미 중 기자들과 만나 "지금 연말 국면이고 그래서 조만간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지만 연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긴 사실상 어렵게 됐다. 현재 한ㆍ미는 종전선언 관련 문안 협의를 거의 마친 뒤 이번주 중 북한의 당 전원회의에서 나올 대남 및 대미 메시지를 주시하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미국 내에서는 의회, 한반도 전문가, 전직 당국자 등 각급에서 종전선언과 관련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8일(현지시간) 미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 35명은 "종전선언은 한반도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종전선언 반대 서한을 백악관과 국무부에 보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미 정치전문매체 더 힐에 실린 한반도 관련 전문 언론인 도널드 커크의 칼럼에도 "문 대통령이 한ㆍ미 간 전통적 동맹을 깨트릴 게 뻔한 거래(종전선언)를 하려고 왜 안달이 났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며 "(종전선언은) 굉장히 터무니없고 결함이 많으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어 지난 7월 이임한 로버트 에이브럼스 전 주한 미군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 또한 25일(현지시간) 미국의 소리(VOA)와 화상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며 "종전선언을 할 경우 '유엔사는 더는 필요 없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가뜩이나 국내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내부 반대를 딛고 종전선언을 추진할 유인이 갈수록 줄어든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미국이 주도하는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에 미국의 주요 동맹 중 한국만 유독 거리를 두는 상황도 미국으로선 달갑지만은 않을 거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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