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런던 공습은 리비도를 자극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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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8호 20면

폭격기의 달이 뜨면

폭격기의 달이 뜨면

폭격기의 달이 뜨면
에릭 라슨 지음
이경남 옮김
생각의힘

미국 논픽션 작가인 지은이는 1940년 5월 10일 밤 영국 런던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검시관’ ‘낡은 우산’ 등 모멸적인 별명으로 불리며 전쟁 관리 능력을 의심받던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물러나고 매파인 윈스턴 처칠이 총리에 오른 날이다.

바로 그날 바다 건너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룩셈부르크·네덜란드·벨기에를 침공했다. 마지노선을 우회해 전격전을 벌이며 파리로 신속하게 진격하는 프랑스 공방전의 시작이었다.

나치 독일은 이어 영국본토항공전(영국 전투)에 나섰다. 40년 7월 10일부터 10월 31일까지 영국인들은 날아오는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폭격기에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폭격기가 밤에도 달빛에 의지해 찾아올 것이란 이유로 사람들은 보름달이나 반달 같이 환한 달을 ‘폭격기의 달’로 불렀다. 공적 용기와 결의 뒤엔 이런 사적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지은이는 이처럼 역사에 인간의 표정과 심장 고동, 그리고 피부 감촉까지 입혔다. 처칠과 부인·자녀를 비롯한 가족, 그리고 주변 인물의 은밀한 사생활과 전쟁으로 인한 미묘한 심리적 변화까지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때문에 흡사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치밀한 각본의 심리 드라마나 영화를 마주한 느낌이다. 21세기형 논픽션이다.

특히 배급제와 시골 피란, 방공호 같은 생활 변화와 함께 언제 목숨을 잃을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본능을 자극한 당시 사람들의 적나라한 사생활까지 가감 없이 전한다. 폭탄이 떨어지면 리비도(성적 충동)가 치솟았다. 불안과 외로움 때문에 아무도 혼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런던 공격이 성적 욕구도 풀어놓은 것 같았다”는 증언이 이를 함축한다.

당시 런던에 갓 도착한 미국 여성은 폭탄과 화재에도 사교생활이 조금도 지장 받지 않는 것을 목격하고 놀랐다. 이 여성은 편지에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라고 썼다. 내일을 볼 수 없는 불안 속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맞은 당시 영국인들의 미묘한 속마음은 오늘날 팬더믹 시대를 사는 우리와 서로 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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