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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검열·사찰 우려 큰 전기통신사업법 개정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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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류제화 여민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류제화 여민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만약 인간이 천사라면 정부는 필요 없을 것이고, 천사가 인간을 통치한다면 정부에 대한 대내외적 통제는 필요 없을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고’ 51번에 이렇게 썼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에 정부가 필요하고,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천사가 아니기에 정부에 대한 통제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가 말한 인간에 대한 불신은 권력분립 원칙으로 승화돼 미국 헌법의 근간이 됐다. 대한민국 헌법도 권력분립제도를 채택함으로써 불신에 기초한 국가 운영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불신에 기초한 국가시스템을 뒤흔드는 입법 사례가 최근 사회적인 논란을 촉발하고 있어 우려스럽다. 공교롭게도 모두 정보 인권과 관련된 전기통신사업법 규정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전기통신사업법 제22조의5 제2항(이른바 ‘N번방 방지법’)은 이용자가 카카오톡·네이버 등 주요 플랫폼에 올리는 영상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불법 촬영물로 판정한 영상을 기준으로 사업자가 사전에 필터링(여과)하도록 의무를 부과했다.

방심위 ‘n번방 법’ 통신비밀 침해
공수처 통신조회, 사찰 의혹 야기

본격적으로 제도가 시행되자 표현의 자유와 통신의 비밀을 침해당한다고 느낀 이용자들이 반발했다. 사전검열인지 여부도 문제가 됐다. 필터링 주체는 형식적으로 플랫폼 사업자이지만 행정기관적 성격이 있는 방심위가 미리 정해놓은 기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행정권의 사전검열을 절대적으로 금지한 헌법 제21조 제2항에 위반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언론사 기자들의 통신 자료를 무더기로 조회해 언론 사찰 의혹에 휩싸였다.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제3항은 수사기관이 수사를 위해 필요하다면 어떤 사법적 통제나 사후 통지 절차 없이도 이용자의 성명·주민등록번호·주소 등 개인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데도 법원은 물론이고 기본권을 제한받는 당사자가 관련 절차에 참여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어 적법 절차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도 2016년 해당 조항이 헌법상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국제 인권기준에 위반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법률의 위헌성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위헌적 입법을 옹호하는 논리에 있다. ‘N번방 방지법’ 토론회에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방심위의 판단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고, 통신 조회 비판을 받은 공수처는 “다른 수사기관에서도 동일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런 논리의 밑바탕에는 ‘정부를 믿어야 한다’는 막연하고도 위험한 인식이 숨어 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정부의 막중한 역할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천사처럼 완벽했다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LH 투기 사태도, 지금 수사 중이거나 법원에 가 있는 수많은 직권남용 범죄들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헌법과 국가 시스템이 인간에 대한 불신이라는 토대 위에 구축됐고, 입법에는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전기통신사업법의 일부 규정은 헌법상 사전검열 금지 원칙과 적법 절차 원칙에 위배된다. 표현의 자유와 통신의 비밀, 개인정보 자기결정권과 같이 정보 인권적 속성을 지닌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해 과잉금지 원칙에도 어긋난다.

입법에 원천적 흠결이 있으면 정부의 자의(恣意)가 작동할 공간이 생긴다. 다행히 주요 대선 후보들이 법 개정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번 기회에 정부의 선의에 기댈 일이 없도록 관련 법령 전반을 검토해 위헌성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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