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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현 정부가 질러놓은 노동정책, 주워담기 바쁜 내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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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고용노동부가 22일 내년도 업무보고를 했다. 현 정부 마지막 노동 관련 업무보고다.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내용은 없다. "4년 반 동안 72조원을 투입해 매년 100만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했다"는 자화자찬이 서두를 장식했다. 그만큼 돈을 퍼부었는데, 왜 노동시장이 아직도 이 모양인지에 대한 반성은 안 보인다.

성과로 든 건 또 있다. 박근혜 정부 때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입안되고 추진했던 국민취업지원제도(한국형 실업부조제)와 고용·산재보험 적용 확대 등이다. 내년 역점 시책사업으로 이 제도의 안착과 안정화를 들었다. 반면 노동시장의 활력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정책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성과로 꼽은 것 가운데 걱정이 앞서는 내용이 보인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과 중대재해처벌법, 정규직 전환과 같은 것들이다. 내년부터 적용되는 것이거나 현 정부에서 추진해 각종 갈등과 문제를 야기한 정책이다. 고용부는 업무보고에서 이들 정책에 대해 "현장 안착"을 강조했다. 정책 시행에 따른 혼란 예방에 사활을 걸겠다는 얘기이자 바꿔 얘기하면 혼란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현 정부가 질러놓은 것을 다음 정부가 수습하기 바쁠 것이라는 예언처럼 들린다.

이날 업무보고에서 ILO 핵심협약과 관련해선 특별한 언급이 없다. 기껏해야 업무보고 말미에 적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사관계 법·제도·관행 개선과제 발굴·검토'가 전부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정부조차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사실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ILO 협약을 거스르는 행동을 보이곤 했다. 광주형 일자리를 비롯한 지역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면서다. 노조 설립 대신 근로자협의회를 권고하고, 노사분규 자제를 지역 일자리 협약에 넣는데 사활을 걸었다. 일자리를 만들려면 노사관계 안정이 관건이라는 분석에 따른 조치다. 하지만 이는 노조 설립의 자유 등을 규정한 ILO 협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다. 한편으로 ILO 협약을 비준하고 한편으론 이를 자제 또는 억누르는 이율배반적 행동이다. 정부가 이럴진대 민간은 오죽 혼란스러울까. ILO 협약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는 이유다.

2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2년 정부 업무보고 합동브리핑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희 농식품부 기획조정실장 직무대리, 박성희 고용부 기획조정실장, 이억원 기획재정부 1차관, 변태섭 중기부 중소기업정책실장, , 이세훈 금융위 사무처장, 김영수 문체부 기획조정실장. 뉴스1

2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2년 정부 업무보고 합동브리핑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희 농식품부 기획조정실장 직무대리, 박성희 고용부 기획조정실장, 이억원 기획재정부 1차관, 변태섭 중기부 중소기업정책실장, , 이세훈 금융위 사무처장, 김영수 문체부 기획조정실장. 뉴스1

업무보고에서 정부는 정규직 전환을 성과로 내세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진 노노갈등과 공정성 문제는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고 수시로 터져 나오고 있다. 이 부작용을 해소할 대책은 업무보고 어디에도 안 보인다. 고작 '공무직 처우 개선을 위한 합리적 임금 및 수당 기준 마련' 정도다. 처음부터 고용형태 전환(정규직 전환) 대신 격차 해소에 방점을 뒀으면 어땠을까 하는 한탄을 부르는 대목이다.

일자리 안정자금도 내년 5월이면 끝난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 따라 노동시장은 실직자가 급증하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 급기야 정부가 민간기업의 인건비를 대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시장교란 정책을 썼다. 그게 일자리 안정자금이다. 이 정책이 현 정부와 함께 수명을 다한다. 내년 6월부터는 그동안 오른 최저임금의 충격을 영세 기업은 고스란히 받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파장이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다. 고용부 업무보고에는 그에 따른 효과나 부작용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정부는 내년 업무보고의 슬로건으로 '더 좋은 일자리'를 내세웠다. 한데 정부가 돈을 퍼부어 만드는 일자리가 더 좋은 일자리일 리 없다. 노년층 등에게 제공하는 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이라는 건 지난 4년 반 동안 봐 왔다. 결국 좋은 일자리는 민간의 활력을 북돋워야 생긴다. 그런데도 민간기업이나 경제단체가 요구하는 노동시장의 규제 개혁과 같은 내용은 거의 안 보인다. 현 정부 내내 해왔던 돈 풀기가 역시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더 좋은 일자리라니, 공감될 리 만무하다. 업무보고에서 정부는 '끝까지 책임 다하는 정부'라고 썼다.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아집으로 비치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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