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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기소권' 선택적 포기한 공수처의 이중잣대 [현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한 지 채 두 달이 안 됐을 무렵인 지난 3월 검찰은 현직 검사들이 연루된 굵직한 사건 두 건을 공수처에 이첩했다. 공수처 외의 다른 수사기관이 검사의 고위공직자범죄 혐의를 발견한 경우 그 수사기관의 장(長)은 사건을 공수처에 이첩해야 한다는 공수처법 25조 2항에 따라서다. 이 조항은 공수처가 검사의 수사·기소에 관한 전속 관할권을 주장하는 근거 조항일 뿐만 아니라 검찰의 그간 ‘제 식구 감싸기’ 관행을 없앤다는 공수처 설립 목적을 설명하는 핵심 조항이다.

검찰이 당시 넘긴 사건 중 하나는 수원지검 형사3부가 수사 중이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긴급출국금지 의혹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가 수사 중이던 ‘윤중천·박관천 면담보고서’ 허위 작성 및 유출 의혹 사건이었다. 중앙지검 형사1부 사건은 이광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관여 의혹도 제기돼 ‘청와대 기획 사정(司正)’ 의혹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두 사건의 핵심 피의자는 동일인이었다. 2018~2019년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김학의 전 차관 별장 성(性) 접대 의혹 사건을 재조사했던 이규원(44·사법연수원 36기) 대전지검 부부장검사다.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장이 20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내 공수처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장이 20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내 공수처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원지검은 지난 3월 3일 공수처에 김학의 불법출금 사건을 이첩했다. 2019년 6월 해당 의혹을 먼저 인지한 안양지청에 압력을 넣어 수사를 무마시켰단 혐의를 받은 이성윤 서울고검장도 함께 넘겼다. 사건을 이첩한 지 닷새 뒤인 3월 7일 김진욱 공수처장이 자신의 관용차를 보내 이 고검장을 공수처까지 모셔와 조사한 뒤 조서를 남기지 않은 이른바 ‘황제 조사’, ‘에스코트 조사’ 논란을 낳았다. 이후 같은 달 12일 수원지검에 이 고검장과 이규원 검사의 불법 출국금지 관련 사건을 통째로 재이첩했다. 이는 공수처에서 수사를 받겠다고 요구해온 피의자들, 이 고검장과 이 검사의 뜻과도 반대되는 일이었다. 당시 김 처장이 페이스북에 남긴 ‘재이첩의 변(辯)’은 이랬다.

“이 사건과 같은 사건을 수사하는 것이 공수처 제도의 취지나 공수처법의 취지에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재 수사처가 구성 중으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중략) 국민 여러분의 너른 이해를 구합니다.”

중앙지검이 ‘청와대 기획 사정’ 의혹 사건을 공수처에 이첩한 건 그로부터 닷새 뒤인 3월 17일의 일이다. 공수처 검사·수사관을 선발하고 있다는 사정은 변한 게 없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공수처는 이 사건을 직접 수사하기로 하고 정식 입건(공제 3호)했다. 김학의 불법출금 사건 재판(지난 6월 15일 2차 공판준비기일)에서 나온 검찰 측 주장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이규원 검사를 조사하기 직전에 공수처로 사건을 이첩했고, 당시는 이 검사만 조사하면 (김학의 불법출금 사건과) 병합기소가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규원 대전지검 부부장검사이 지난 10월 1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차 공판기일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규원 대전지검 부부장검사이 지난 10월 1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차 공판기일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그러나 공수처는 입건 뒤 정원에 한참 못 미치는 검사와 수사관을 임용하고도 수사 착수에 미적대다 지난 5월 말에야 이 검사를 연달아 불러 조사하고 지난 7월엔 이광철 전 비서관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다. 그런 뒤에도 추가 압수수색이나 사건 관계인 소환 없이 결론을 내지 않고 사건을 뭉개왔다. 그러는 동안 중앙지검 형사1부도 당초 사건의 본류였던 곽상도 전 의원, 윤갑근 전 대구고검장이 이규원 검사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을 처리하지 못했다. 급기야 사건 관계인인 이광철 전 비서관의 민정비서관 재직 중 단행한 마지막 검찰 인사에서 당시 형사1부 부장·부부장·평검사 등 수사팀 검사들이 줄줄이 다른 검찰청으로 발령 나며 수사팀이 해체됐다.

그로부터 5개월 뒤 지난 17일 공수처는 이 사건을 결론 내지 않고 그대로 다시 중앙지검 형사1부로 보냈다. 공수처는 “수사 종결 후 동일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과 협의를 거쳐 피의자 등 사건 관계인에 대한 ‘합일적 처분’을 위해 이첩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수사는 끝냈지만, 명예훼손 사건을 가진 검찰이 최종 처분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검찰에 보낸 수사기록에 처분에 관한 의견을 적시했다고도 했는데, 기소 의견인지 불기소 의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공수처의 현직 검사 수사 1호란 상징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검찰에 칼을 반납한 셈이다.

공수처가 포기한 건 또 있다. 공수처 관계자는 이번 이첩 방식에 대해 “단순 이첩”이라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지난 3월 12일 수원지검에 김학의 불법출금 사건을 재이첩하면서는 “수사 후 송치하라”고 요구하며 공수처가 공소제기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공소권 유보부 이첩’을 주장했다(※검찰은 이를 거부하고 이 고검장과 이 검사에 대한 기소를 강행했다). 그런데 이번엔 거꾸로 공수처가 수사를 마친 뒤 공소제기 여부를 검찰이 판단하라고 떠넘겼다. 일관성을 잃은 선택적 공소권 행사의 전례를 만들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관들이 지난달 29일 오전 '이성윤 서울고검장 공소장 유출 사건'과 관련한 대검 서버 압수수색을 위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관들이 지난달 29일 오전 '이성윤 서울고검장 공소장 유출 사건'과 관련한 대검 서버 압수수색을 위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청와대 기획 사정 수사 상황을 잘 아는 한 검찰 관계자는 공수처의 9개월 만의 재이첩에 대해 “솔직히 어이가 없다. 되돌려 줄 거면 수사팀이 해체되기 전에 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검찰에서 이 수사를 이끌었던 변필건 전 중앙지검 형사1부장(현 창원지검 인권보호관)은 “노코멘트”라고만 했다.

공수처가 처음부터 ‘수사 여력’ ‘합일적 처분’ 같은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면, 장장 9개월간 수사를 끌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사건은 위법 논란을 불사하고 수사하고, 어떤 사건은 마냥 뭉개고, 또 다른 사건은 기껏 수사를 마친 뒤에 처분권을 포기하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도 이 같은 물음에 책임 있고 납득할 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게 출범 11개월을 맞은 공수처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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