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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의 경영참여, 그걸 법으로 밀어붙이면 벌어질 일 [현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노동기본권 강화와 노동이사제 도입 등을 주장하며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뉴스1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노동기본권 강화와 노동이사제 도입 등을 주장하며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뉴스1

더불어민주당이 노동이사제 입법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경영의 이해당사자로서 당연히 이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는 "법으로 경영권 침해를 강제하는 것은 시대 역행"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 중이지만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업은 여당에 의해 생략됐다. 밀어붙이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노동계는 왜 이렇게 노동이사제에 목을 맬까. 경영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것인데, '노동자는 이해관계자'라는 논리를 댄다. 이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소비자, 지역주민 등 기업의 이해관계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이사직을 배분해야 할까.

헌법 제119조 제1항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천명하고 있다. 일부 유럽국가에서 노동이사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이들 국가는 자유시장 경제가 아니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다. 주주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더욱이 노동계가 모범사례로 주저 없이 꼽는 독일의 경우 노동이사에게는 의결권이 사실상 없다. 한국과 달리 독일은 감사이사회와 이사회로 이원화돼 있다. 노동이사가 참여하는 이사회는 주된 의사결정을 하는 일반 이사회가 아니라 감사이사회다. 그런데도 독일 기업 중 상당수는 '노동이사가 신속한 의사결정에 방해가 된다'는 입장이다. 또한 독일의 노동이사는 노조 대표가 아니다. 근로자 대표로 노조원뿐 아니라 관리직, 전문직 등 모든 근로자가 투표로 선출한다. 선출된 뒤에는 경영 수업을 받는다.

노동이사제의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영현안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논문도 있다. 공공부문의 경우 낙하산 인사를 막는 장치 역할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법으로 경영 침해 논란을 유발하며 기업의 이사진을 꾸리도록 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노사가 법 해석을 두고 법원으로 가는 후진적 갈등이 비일비재한 상황이다. 이런 판에 법 만능주의로 노사 자율을 해치는 행위가 경쟁력 배양에 도움을 줄 리 만무하다.

따지고 보면 노동계가 법으로 노동이사제를 강제토록 요구하는 것은 투쟁의 한 형태로 노동이사제를 활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노동이사제 쟁취'라고 한다. 노조 스스로 회사를 위하는 노조라는 인식을 심으면 경영진이 노조의 의사를 안 물을 리 없다. 노사문화대상을 받은 기업들치고 협력적 노사관계가 구축되지 않은 곳이 없다. 이들 기업에선 노동이사에 버금가는 근로자의 경영 참여가 정착해 있다. 투쟁 모드에선 경영 참여의 길을 열기가 어렵다. "노조의 경영참여는 노조 스스로 주주에게 믿음을 심어주면 해결될 사안이다. 그럴 자신이 없으니 법으로 강제하려 드는 것이 아니냐"(익명을 요구한 경제학과 교수)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경영진도 문제가 있다. 노조를 두려운 존재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협력적 노사관계가 구축된 회사 중에는 경영진이 먼저 열린 마음으로 근로자에게 다가가는 곳이 많다. 이런 기업은 대부분 '근로자 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1997년 제정)'을 경영의 한 축으로 삼고 있다. 노사협의회를 통해 경영 관련 사안을 세세하게 공개하고, 의견을 구한다.

결국 노사 양자 간의 신뢰가 노동이사제의 관건이다. 법이 신뢰를 구축하지는 못한다. 법으로 짓눌러 노동이사제를 도입한다고 치자. 신뢰 없는 이사진이 꾸려진다면 그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까. 결과는 뻔하다. 이사회가 투쟁과 갈등의 장으로 변질하고, 기업의 의사결정은 더뎌지게 마련이다. 노사관계에 개입하고 법으로 제어하려 드는 못된 습관을 지닌 정치권이 이런 생각까지 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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