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 운동과 일본 정부 및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이끌어온 이금주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이 102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그 또한 일본 제국주의 때문에 남편과 생이별을 당한 피해자였다.
예순아홉에 유족회장 맡아 ‘1000인 소송’ 등 투쟁
일제에 의해 21세때 남편과 생이별
1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에 따르면 이금주 회장은 지난 12일 오후 11시 55분쯤 전남 순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오랜 투병 끝에 별세했다.
이 회장은 일제에 끌려가 목숨과 가족을 잃고 평생을 후유증에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대변해 온 일제 피해자 인권 운동의 주역으로 불린다. 이 회장은 21살이던 1940년 10월 김도민씨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결혼 2년 만인 1942년 11월 일본 해군 군무원으로 남태평양에 끌려갔다. 김씨는 이듬해인 1943년 11월 25일 남태평양 타라와섬에서 미군의 대규모 상륙작전 전투 중 사망했다.
예순아홉 나이에 맡은 유족회장
이 회장은 1988년 들끓는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이어 태평양전쟁 희생자 전국유족회가 발족한 것을 계기로 광주유족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이 회장은 1992년 원고 1273명이 일본 전범 기업에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이른바 ‘광주 1000인 소송’을 이끌었다. 일제에 의한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제기한 대규모 집단 소송이었다.
이 회장은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을 상대로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소송 ▶일본군 위안부‧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 등이 원고로 참여한 관부재판 소송 ▶B‧C급 포로감시원 소송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일본 외무성 한·일회담 문서공개 소송 등 7건의 법적 투쟁을 해왔다.
일본 오가기만 80여 차례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는 “이 회장이 소송과 증인 출석, 시민단체와 연대 활동 등 노구를 이끌고 일본을 오간 것만 80여 차례가 넘는다”면서도 “결과는 번번이 패소뿐이었고 일본 법정에서 기각당한 것만도 17차례에 이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멈추지 않았다. 2003년 국회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논의가 한창일 때 “내가 죽더라도 이 법안을 제정해 달라”는 유서를 전했다.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한일회담 문서 공개 소송’에도 직접 원고로 나서 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다. 이 회장의 헌신에 힘입어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 일제 강제동원 특별법이 제정됐고 40년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한일회담 문서’도 세상에 나왔다.
빈소로 이어진 추모 발길
이 회장의 빈소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끝없이 투쟁해 온 그의 삶을 기리려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 회장과 함께 일본 정부 및 전범 기업과 맞서고 미쓰비시 중공업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로 참여한 양금덕(90) 할머니도 빈소를 찾았다.
그는 “이 회장이 돌아가셨다니 기둥 하나가 부러져 나간 것 같다”며 “일제 피해자들을 위해 오랜 시간 수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힘들다는 내색 한 번 없었고 하늘나라에 훌훌 날아가셔도 우리 일을 살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도 이 회장의 뜻을 기리는 추도사가 전해졌다. 나고야 미쓰비시·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해 온 일본 활동가 다카하시 마코토씨는 “한일 대립의 원흉인 일본 국민으로서 ‘편안히 잠드소서’라고 말할 자격 없다”면서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한국 속담을 가슴에 새기고 근로정신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맞서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