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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발목잡는 규제법안 발의…文정부가 이전 정부의 3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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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이 재석 266인, 찬성 164인, 반대 44인, 기권 58인으로 가결되고 있다. [뉴스1]

지난 1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이 재석 266인, 찬성 164인, 반대 44인, 기권 58인으로 가결되고 있다. [뉴스1]

경남 창원의 전자부품 제조업체 김 모 대표. 14일 그는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중대재해처벌법에 대비해 안전·보건 관련 인력을 뽑아야 하는 데 오겠다는 사람이 없어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보건·안전 관련 자격증을 보유한 전문 인력이 대기업보다 임금이 낮은 중소기업에 선뜻 지원하겠냐”며 “정부가 인건비를 지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효과가 확실치 않은 의무만 개별 기업에 지우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현장에서는 CEO(최고경영책임자)를 기피하거나 바지사장을 내세우는 등 엉뚱한 대책이 나오기도 한다. 한 기업 관계자는 “사고가 생기면 무조건 1년 이상 징역이나 10억원 이상 벌금”이라며 “예상치 못한 사고로 대표가 처벌되고 회사가 망할 수도 있으니 멀쩡한 회사들이 바지사장 얘기까지 꺼내는 것"이라고 전했다.

文정부에서 규제 법안 朴정부의 3배

박근혜.문재인 정부 기간 중 규제법안 국회 입법발의 비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박근혜.문재인 정부 기간 중 규제법안 국회 입법발의 비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내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대응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는 기업, 특히 중소기업들의 단면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해외 기업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춰 미래 투자나 성장 전략 짜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을 비롯한 각종 규제에 발목이 잡혀 투자나 먹거리 발굴보다 '바지사장' 같은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규제 혁파를 외쳤던 현 정부에서도 출범 이후 전 정부에 비해 3배에 달하는 규제 법안이 발의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가 운영하는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현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 10일부터 14일까지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발의된 규제 관련 법안은 총 3919건에 이른다. 이는 박근혜 정부 시절 발의된 1313건의 약 3배에 해당한다. 이와 달리 정부는 지난 9월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4년간 8623건의 규제를 개선했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앞장서 규제를 개선하는 동안 여당과 국회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규제를 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180석의 거대 여당이 주도하는 21대 국회는 1년 4개월(2020년 5월 30일~2021년 10월 20일) 남짓 만에 20대 국회에서 4년간 발의된 법안 수의 절반(54.2%)이 넘는 법안을 쏟아냈다. 본지가 전국경제인연합회와 21대 국회 발의 법안을 분석한 결과 20대 국회에 비해 규제법안은 90건(7.6%), 규제조항은 98건(4.3%)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1대 국회, 규제3법·중대재해법 등 쏟아내  

국회 출범 후 1년 4개월간 발의된 규제 법안 조항 수.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국회 출범 후 1년 4개월간 발의된 규제 법안 조항 수.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더욱이 21대 국회에서는 기업 경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굵직한 규제들을 통과시켰다. 여권과 정부가 ‘공정경제 3법’, 경영계는 ‘기업규제 3법’이라고 부르는 상법개정안·공정거래법 개정안·금융그룹 감독법을 비롯해 중대재해처벌법, 노조법 개정안 등이 21대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들 법안을 분석한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현실적으로 실효성이 없고 기업 활동을 왜곡하는 규제가 다수 포함됐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발의된 산업안전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의 경우 기업 대표에게 사업장의 안전·보건사항과 근로감독관 확인의무를 부여하고 위반 시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유 팀장은 “현장 관리자가 아닌 대표이사에게 사업장의 안전사항을 확인하고 책임질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현장 실태에 맞지 않으며 형법상 ‘자기책임 원칙’에도 반한다”고 말했다.

역시 지난해 11월 발의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법 일부개정안은 건설업 사업주에 한해 건설 일용근로자에 대한 성희롱 예방 교육을 매달 1회 실시하도록 의무화했다. 이에 대해 건설업계는 “건설업만 특정해 매달 1회 교육을 의무화하는 것은 다른 업종과의 형평성에 어긋나며 단기 근로자가 많은 건설 현장의 실태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제21대 국회 계류법안 조항 분석.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제21대 국회 계류법안 조항 분석.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이처럼 현장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식 규제에 산업계는 어려움을 호소한다. 울산에 있는 한 중견 조선업체는 벌써부터 내년 여름을 걱정하고 있다. 조선업 특성상 옥외작업이 많아 한여름에는 한 달에 서너명씩 열사병 환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요양기간이 4일 넘는 직원이 3명 이상이 발생하면 중대산업재해로 간주돼 대표이사가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이 업체의 안전관리 담당자 최 모씨는 “아무리 조심해도 여름철에는 열사병 환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큰일”이라며 “증상의 경중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처벌부터 한다고 하니 대표가 환자가 발생할 때마다 수사를 받으러 다니고 처벌도 받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산업계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올해 상반기에 50인 이상 기업 322곳을 대상으로 ‘규제혁신 만족도 조사’를 한 결과 현 정부에 대한 규제혁신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49.8점으로 집계됐다. 정부의 규제혁신 성과가 비교적 좋았던 시기가 언제인지 묻는 질문에 "정부별로 큰 차이가 없다"고 응답(70.8%)이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이어 이명박 정부(9.9%), 문재인 정부(7.8%), 노무현 정부(4%) 순으로 답했다. 경총 관계자는 "새로운 정부마다 규제혁파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개선보다 또 다른 규제가 생긴데 대한 실망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맞아 경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도 과감한 규제 정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규제가 개선돼야 기업도 더 많은 투자나 고용 확대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의 역할은 시장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각종 제약을 최소화하는 것”이라며 “경제를 살리려면 새로운 지원책의 고민에 앞서 기업 발목 잡는 규제를 풀고 경영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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