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서 판문점까지…이찬삼특파원 한달 취재기(다시 가본 북한: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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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빌딩군이나 관개시설로 위장/“남쪽선 휴전선 전역 콘크리트벽” 선전/장교출신 교포 설명 없었으면 속을 뻔
김일성의 올해 신년사 이후 북한은 남한이 군사분계선 일대에 설치해놓은 콘크리트장벽이 남북문제의 최대 걸림돌인 양 내세우고 있다.
북한 당국은 우리측의 자유왕래등 각종 교류제안에 대해 국가보안법 철폐를 전제조건으로 되풀이해오면서 이를 체제적인 장애물로 여겨왔듯이 휴전선의 콘크리트 장벽을 물리적인 그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측은 이에 따라 최근 우리측 서부전선,즉 경기도 연천군과 파주군이 건너다 보이는 비무장지대 철책 가까이에 역선전용 전망대까지 가설해 놓았다.
개성에서 자동차로 50분쯤 남하하다 눈앞을 가로막는 가파른 대덕산을 굽이굽이 올라가면 북측의 최전방고지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차를 내려 다시 계단을 따라 10여분간 힘겹게 올라선 곳에 이들의 「콘크리트 장벽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20여개의 ㄱ자형 망원경들이 삼각대에 고정되어 있고 20여개의 휴대용 쌍안경들이 그 옆에 가지런하다.
기자가 이곳에 도착한 시각은 해질무렵인 오후 6시50분쯤. 중좌계급장을 단 인민군장교가 가리키는 곳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오라 자유의 품으로』『서울에서 삽시다』『자유평화』 등의 큰 글씨와 함께 태극기와 유엔기가 펄럭이는 남쪽초소가 임진강가에 보였다.
○“국군을 적” 심정 착잡
대한민국 육군에서 병역의무를 마친 기자가 북의 인민군초소에서 인민군장교의 브리핑을 듣고 있자니 감정이 착잡했다.
『저쪽을 보십시오. 적들이 만든 초소와 괴뢰들의 태극기,그리고 통일을 가로막는 콘크리트장벽이 보이지 않습니까.』
국군을 「적」으로,우리의 국기를 「괴뢰들의 태극기」로 부르는 인민군장교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쓰라린 충격이었다.
이때 확성기 방송이 들려왔다. 시계는 정확히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또렷이,때로는 희미하게 들리는 이 확성기 소리는 말로만 듣던 남한의 대북방송이었다. 방송내용은 그러나 기대했던 「선전」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뉴스성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상 처음으로 북한 도자기등 예술품 1백20점이 전시되며 세계 씨름대회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등이었다.
브리핑을 하던 인민군장교가 『보십시오. 선생님들이 여기 오신 것을 적들이 알고 심리전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저앞에 집처럼 보이는 검은 것이 스피커 뭉치입니다』라고 했다. 평범한 내용의 보도방송을 그는 「심리전방송」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설명을 계속했다.
『저 콘크리트장벽은 8m 높이로 판문점 일부와 강원도 험한 산속 일부를 제외한 2백40㎞에 걸쳐 설치돼 있으며 77년에 공사를 시작해 80년에 끝낸 것입니다.』 공사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것 같은 상세한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공사가 끝난지 10년이나 지났는데 왜 이제와서 문제를 삼는가』라고 묻자 인민군장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통일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하시다가 콘크리트 장벽이 자유래왕에 장애물이 되어 이를 없애자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알듯 모를 듯한 말을 이어 나갔다.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기 전까지는 비록 우리 민족은 래왕을 못했지만 짐승들은 비무장지대를 오갔습니다. 이제는 그것마저 끝장났으니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땅속에 있는 선조들도 통탄할 일입니다.』 사뭇 흥분된 어조였다.
○바위덩이로 눈가림
그의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의 신년사 이후 콘크리트 장벽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자 남쪽에서는 이를 감추기 위해 흙을 발라 위장했으며 남북간의 영원한 분단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는 것.
동행한 재미교포들은 이와 같은 북측의 일방적인 설명에 6백리에 걸친 콘크리트 장벽 설치를 한동안 사실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일행가운데 ROTC출신의 한 재미교포가 장벽설치 작전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을 털어놓아 장벽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은 장벽이 주로 6·25때 북쪽 탱크가 지나온 지점에만 대전차 방어용으로 구축된 것이며 이 정도의 군사용 장애물은 북쪽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이야기였다.
○철구조물로 덮어놔
북한은 남한의 국가보안법 보다 더욱 엄격한 반국가죄를 그들의 형법에 규정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감추어 왔듯이 콘크리트 장벽같은 군사용 구조물도 남쪽만이 설치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북쪽 전망대에서 바라다보이는 남쪽의 콘크리트장벽은 긴 담장처럼 이어져 있어 한반도의 허리 전구간이 모두 막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인민군장교의 막힘없는 설명을 듣다보면 실제로 현장을 답사해 보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는 북쪽 논리에 설득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런가하면 동행이었던 ROTC출신의 재미교포말처럼 북쪽 장애물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향하는 길목마다에도 빌딩군이나 관개시설로 위장한 장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나 트럭이 지나다니는 길 양옆에 군데군데 쌓아둔 바위덩이는 사실상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결정적인 장애물들은 멀쩡한 길에 깊은 하천이 지나가는 것처럼 파놓고 그위를 쉽게 뜯어낼 수 있는 조립식 철구조물로 덮어놓은 것이라든지 길가 언덕에서 쉽게 굴러 내리도록 장치된 거대한 콘크리트더미였다.
○해안선따라 철조망
3∼4층 규모의 대형 콘크리트더미는 정사각형을 쌓아올린 형태로 그 사이사이에 받침대를 괴어놓아 유사시에 이를 쳐내면 도로쪽으로 굴러 길이 막히도록 되어 있다.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다보면 이러한 장애물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북한은 이런 구조물이 있는 곳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장애물을 함께 설치해 놓아 차를 타고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길을 엉뚱한 곳으로 유도하는 교묘한 위장전술까지 쓰고 있다.
뒤에 가본 원산 앞바다에도 해안선을 따라 2중 철조망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이곳에도 키큰 식물을 심어 얼핏 보기에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놓았다.
판문점에서 평양으로 되돌아오는 길의 차속에서 북한 최전방 초소의 인민군장교가 열을 올려가며 『남한만이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되씹어 보며 북한에는 과연 그런 장애물들이 없을까 하고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해답은 의외로 쉽게 얻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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