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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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3부 남로당의 궤멸/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김일성 서울방문설 나돌아/김삼룡 체포되자 일부선 “이승엽죽이자”흥분
김일성이 나를 중앙간부부부부장에 발탁하는 것을 왜 거부했을까. 나의 입당보증인인 권오직은 1926년 6ㆍ10만세 투쟁을 직접 조직,지도한 권오직의 친동생이고 조선공산당 파견 제1회 소련유학생이며 민족해방투쟁을 계속하다가 8ㆍ15때 대전형무소에서 비전향으로 출옥한 거물이었다.
권오직과 박헌영은 1925년 4월17일 함께 조선공산당과 공산청년회를 조직한 절친한 동지다.
만약 김일성이 박헌영ㆍ권오직을 숙청할 계획이라면 나도 그들의 한패라고 목을 죄고 말것이 뻔했다.
나는 앞날에 대해 불안을 느꼈지만 피할 수도 없으며 도망갈 데도 없었다.
나도 이제는 김일성이 싫어할 정도의 간부가 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서울의 정계에서는 이승엽과 대항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당원 재등록 사업에서 내가 보증해 당원으로 등록시켜 준 사람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들은 각 기관에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의용군 사령부에도 상당수 있었다.
안영달이 김삼룡을 체포했다는 소문이 났을 때 의용군 사령부에 있는 김모라는 친구가 찾아 왔었다. 그는 흥분하여 『안영달이 정말로 김삼룡을 체포했는가』라며 나에게 확인했다. 『이순금이 그렇다하니 틀림없으며,나도 그자에게 속아 금년 1월2일 밤 신당동 아지트에서 경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될 뻔 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를 악물면서 자기가 가서 안영달을 당장 쏘아죽이고 안의 상부 이승엽도 죽여버리겠다는 것이었다.
타락분자이며 야심가인 이승엽을 청산해버려야 남로당의 이상이 산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로서는 이승엽을 숙청하는데 대원을 동원할 수 없으니 나의 이름을 빌려달라고 했다. 비밀은 절대 지키겠다면서….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승엽을 죽이면 우리보다 더 좋아할 사람이 따로 있을는지 모른다. 언제든지 모순과 대립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래만 살아남으면 정직한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 이승엽과 김일성은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우리가 그들에게 맞아 죽지않고 살아남으면 우리가 반드시 이기는 것이다. 좌절하지 말고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나갑시다.』
이같은 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일성과 이승엽은 죽여야 한다면서 거듭 흥분했다.
『김일성이 서울에 반드시 올 것입니다. 나 혼자라도 해치울 작정입니다.』
그는 목에 핏줄을 세웠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범순으로부터 2∼3일내에 평양의 큰사람,즉 김일성이 서울에 온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그런 생각은 마시오. 그자들은 역사적 심판에 의해 죽여야지 테러로 죽이면 도리어 민족적 영웅이 되고 마오. 때를 기다리시오.』 나는 그를 계속 달랬다.
『부처님의 자비심이구먼요. 나는 참고 견딜수가 없어요.』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서 버렸다. 나의 이름을 빌려주면 해치우겠다고 한 그의 말을 되씹어보니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신문사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 덕수궁 담길을 걸었다. 40대가 넘은 인민군 신병들이 소달구지를 끌고 열을 지어 이북에서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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