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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생사초' 진짜 있었다…공직자 좀비 만든 이것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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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사극 '킹덤'의 첫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좀비 사극 '킹덤'의 첫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그냥 강 건너 우리 핏줄에게 돌아가요. 힘들게 잡은 모피도 다 뺏기고, 위험한 밀정 노릇까지 해주면서 언제까지 무시당하고 살 건데요."
"폐사군 저 땅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이었다. 조선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어. 우리는 그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
"우리의 조상에겐 그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모든 걸 다시 다 빼앗아 갔어요."

[역발상]'킹덤-아신전'의 조선-여진 모피 갈등

어린 아신의 애원에도 아버지 타합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킹덤-아신전'의 초반에 나오는 이 장면은 조선과 여진족의 복잡한 관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조선 초만 해도 관계는 원만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의 군벌 출신이기에 여진족과 관계가 돈독한 편이었고, 그 군사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의형제이자 건국 공신인 퉁두란(이지란)이 여진족 추장 출신이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지요.

다만 태종 이후 조선이 줄기차게 압록강·두만강 일대로 국경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오던 여진족들에게는 선택지가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①조선에 복종해 지도층은 관직을 받고 일정 규모의 땅과 자치권을 얻는 방식과 ②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조선과 갈등을 감수하며 독립적 세력으로 남는 방식입니다. ①을 선택한 여진족들은 성저야인(城底野人)이라 불렸습니다.

좀비 사극 '킹덤'의 첫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 [사진 넷플릭스]

좀비 사극 '킹덤'의 첫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 [사진 넷플릭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제1 국방문제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이었습니다. 이순신·김시민·신립 등 임진왜란에 활약한 장수들이 모두 북쪽 변경을 지키던 장수라는 것도 이런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들은 왜란 발발 가능성이 커지자 급히 남쪽으로 임지가 변경된 장수들입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조선은 우세한 무기와 전술을 토대로 여진족을 압도했지만, 여진족은 게릴라 작전으로 변경을 약탈하며 조선 정부의 골칫거리가 됐습니다.

그랬던 만큼 조선은 복속되지 않은 여진족의 동태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농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이들은 종종 변경을 습격해 약탈하곤 했습니다. 세종 때 개척한 여연(閭延)·우예(虞芮)·무창(茂昌)·자성(慈城) 등 사군(四郡)은 세조 때 모두 없앴는데, 폐사군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만큼 방비는 어렵고, 주민들을 정착시키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성저야인들에게 일정 규모의 땅과 관직으로 회유하면서 국경의 동향을 주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성저야인이 다른 여진족들에게는 좋게 보였을 리가 없었겠죠. 처지는 조선과 여타 여진족 사이에선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아신의 아버지 타합이 '동족의 배신자'라며 다른 여진 부락에 의해 감금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좀비 사극 '킹덤'의 첫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 [사진 넷플릭스]

좀비 사극 '킹덤'의 첫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 [사진 넷플릭스]

분쟁의 근원, 모피
그런데 당초 조선에 협조적이었던 성저야인들도 점차 조선에 대해 등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조선 내에서 '2등 민족' 멸시받는 것, 동족인 여진족으로부터의 위협과 회유 등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 모피에 대한 압박이 가장 컸습니다.

모피, 그중에서도 초피(貂皮)라 불린 담비 가죽은 조선과 중국에서 매우 고급 상품에 속했습니다. 태종은 하륜·성석린·조영무 등 자신이 가장 아끼던 신하들에게 초피를 선물하기도 했고, 중종반정 때는 초피를 뇌물로 주고 공신에 임명된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조광조가 아뢰기를, '그중에는 초피(貂皮)를 뇌물로 주고서 얻은 자가 5∼6인 있으니 공신을 어찌 뇌물을 써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뇌물을 써서 얻은 자가 누구인가?' 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이를테면 최유정(崔有井)이 그런 사람입니다.'" (『중종실록』 14년 11월 9일)

담비. 조선 시대엔 함경도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값비싼 공물이었다. [사진 pixabay]

담비. 조선 시대엔 함경도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값비싼 공물이었다. [사진 pixabay]

명나라 사신도 초피를 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태종 때 사신으로 온 환관 황엄은 푸른색 비단옷을 내놓으면서 그 안을 초피로 채워달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세조는 명나라 사신들에게 초피로 만든 옷을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이로도 부족해 명나라 사신들은 아예 자신들이 가져온 비단으로 초피를 헐값에 사고 싶어 했고, 이에 조선 조정은 평안도와 함경도에 2000장씩 할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좋은 초피가 나는 지역은 대개 세조 때 없앤 폐사군 지역이었고, 이곳은 여진족들의 사냥터가 돼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함경도에 초피 180장, 서피(다람쥐 가죽) 280장 등을 매년 세금 명목으로 부과하는 한편, 성저야인들에게도 일정량의 초피를 바치게 하는 대신 쌀이나 콩 등 곡물을 내려주며 통제했습니다. 그리고 워낙 고가인 만큼 조선 내에선 정3품 당상의 부제학(副提學) 이상만 초피를 착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회의 안정은 곧잘 사치로 흐르곤 합니다. 조선도 건국 이후 100년간 외침이 없자 성종 때부터는 사치 풍조가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부녀자들이 초피로 만든 옷이 없으면 그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당시 기록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성종 3년엔 예조에서 사치를 금하는 조목을 만들면서 '일반인은 초피로 만든 옷이나 방한 도구를 착용할 수 없다'는 조목을 따로 만들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되려 연산군 때가 되면 국왕부터 사치를 권장하면서 초피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고, 초피에 대한 수요는 가파르게 치솟았습니다. 함경도와 성저야인들이 공물로 바치는 정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이죠.

영화 '간신'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연산군(김강우)

영화 '간신'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연산군(김강우)

조선의 안보 불안을 불러온 초피
조선이 성저야인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중요한 수단은 식량입니다. 농사에 서툰 성저야인들은 늘 식량이 부족했고, 쌀과 콩 같은 곡물을 조선 정부를 통해 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이들에게 농사에 필요한 소나 농기구가 넘어가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습니다. 하지만 초피 열풍이 이런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조선 정부가 평안도나 함경도 수령들에게 초피를 할당하면 지방 수령들은 할당량보다 더 많은 초피를 챙기곤 했습니다. 이렇게 뒤로 빼돌린 초피는 중앙의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로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지방 수령들은 중앙에 올릴 진상품이라면서 백성들을 쥐어짰고, 초피를 구하기 어려운 백성들은 결국 성저야인과 교역을 시작합니다. 농사에 필요한 소나 농기구 또는 식량을 내주며 초피를 얻게 된 것이죠. 원래 조선인과 성저야인과의 교역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당장 초피가 필요한 지방 수령들은 눈을 감거나 오히려 성저야인과의 교역을 재촉하곤 했습니다.
심지어 일부 수령은 관아에 속한 소(牛)를 주고, 야인들에게 초피를 구매했을 정도인데, 결국 농사를 지을 소가 부족해 사람이 논을 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함경도의 변장들은 대부분 소를 가지고 모물(毛物)을 환매(換買)하고 있으므로 장사꾼들이 소를 사가지고 오는 사람이 많아서 농우(農牛)가 이미 다 없어져 논을 갈 때 사람이 소가 하는 일을 대신한다고 하니 변장에게 엄히 신칙하여 매매를 억제하게 하소서." (『명종실록』 18년 8월 7일)

좀비 사극 '킹덤'의 첫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 [사진 넷플릭스]

좀비 사극 '킹덤'의 첫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 [사진 넷플릭스]

이런 상황은 조선의 안보에 큰 위협을 안기게 됐습니다.
첫째, 성저야인들은 점차 조선 정부에 식량을 기대지 않아도 되면서 독립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초피의 가치를 깨닫게 된 이들은 점점 초피의 가격을 올리며 협상에서 우세를 점하기 시작합니다.

둘째, 성저야인들의 무기 발달입니다. 야인들은 원래 짐승의 뿔로 무기를 만들곤 했는데, 이때 조선인들로부터 받은 철제 농기구를 무기로 바꿨습니다. 결국 초피 때문에 여진족들의 무장력이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죠. 이는 곧바로 국방력의 불안을 야기했고, 훗날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지자체장의 '검은 거래'가 나라 전체를 위험으로 끌고 간 셈입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사진 네이버 영화]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사진 네이버 영화]

이런 문제 때문에 성종 때 평안도와 함경도 등에서 초피 공납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일어났고, 실제로 면제하기도 했지만, 초피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결국 15년 뒤엔 재개됩니다.

성저여진의 복수는 생사초 아닌 초피
지방 수령 중에는 노골적으로 야인에게 초피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무리한 방법도 동원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과정에서 성저야인들과 갈등의 골은 깊게 팼습니다.

수령들은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성저야인들로 하여금 억지로 초피를 팔게 했는데, 가격을 제대로 치르지 않고 헐값에 강매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들에게 중앙에 진상할 것이라며 과다하게 받아낸 뒤 일부만 바치고는 그 차액은 자신들이 챙겨 원망을 샀습니다.

1594년 6진 중 한 곳인 온성(穩城)에서 일어난 성저야인들의 반란은 바로 이런 문제가 누적되며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온성부사 전봉은 오래된 보리를 성저야인들에게 억지로 나누어주고 1두(斗)마다 초피 1장을 징수해가는가 하면, 성저야인 부락에서 제때 초피를 바치지 않으면 이들을 잡아가두고 처벌을 가하곤 했습니다.
결국 조선과 여진족 사이에서 조선의 편에 섰던 성저야인들마저도 등을 돌리는 상황까지 오게끔 자초한 셈입니다.

'킹덤-아신전'에서 어린 아신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생사초를 발견한다. [사진 넷플릭스]

'킹덤-아신전'에서 어린 아신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생사초를 발견한다. [사진 넷플릭스]

애당초 이들을 제대로 관리·감독했어야 할 중앙 정부의 고위 관직자들은 모의 유혹에 넘어가 되려 공생 관계가 됐습니다.
지방수령들은 일부 가구를 아예 산장한(山場漢)으로 지정했는데, 세금 명목으로 담비 가죽을 구하는 것을 전담시키는 것입니다. 또, 담비의 털이 좋지 못하면 추가로 세금을 거두고, 이것으로 서울의 시장에서 초피를 사오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강계 등 함경도의 많은 지역에서 백성들이 도망쳐 일부는 만주로 넘어가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습니다.

'킹덤-아신전'에서는 아신이 죽은 사람을 좀비로 되살리는 생사초를 조선에 유통시키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때 조선을 병들게 한 것은 생사초가 아니라 모피였습니다.
모피에 대한 공직자들의 탐욕은 성저여진의 반란-여진족의 철제 무기화로 이어졌으니, 훗날 정묘·병자호란의 싹은 이미 이때부터 틔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모피를 탐하던 조선의 공직자들이 바로 조선 사회와 백성의 고혈을 빨아마신 좀비가 아니었을까요.

※이 기사는 김순남 『16세기 조선과 野人 사이의 모피 교역의 전개』, 김윤순 『14~17세기 약탈과 교역을 통해 본 여진경제』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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