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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남편'인 줄 알면서 모른척했다, 그녀들의 진심 [역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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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틴 기어의귀환'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마틴 기어의귀환'의 한 장면 [중앙포토]

프랑스의 유명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주연한 프랑스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은 프랑스 농민 마르탱 게르(1524~1560)의 실화를 다룬 작품입니다. 다소 낯선 프랑스 작품인데도 흥미로운 스토리 덕분에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죠.

1548년 남프랑스의 아르티가에 살던 농민 마르탱 게르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가출합니다. 8년 만에 아이를 가질 정도로 성(性)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탓인지, 완고한 부친과의 갈등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뒤, 자신이 마르탱 게르, 아니 '마르탱 게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사실 그의 본명은 아르노 뒤 틸.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완벽하게 마르탱 게르로 연기했고,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친척과 이웃도 그를 믿게 됩니다.

무엇보다 마르탱 게르의 아내 베르트랑드가 그를 '내 남편'이라며 받아들인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후 3년간 둘 사이에는 두 명의 딸도 태어났습니다. 행복한 시간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마르탱 게르의 삼촌 피에르 게르가 돌연 '이 녀석은 가짜다'라고 선언하며 소송을 걸기 전까지는요.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의 포스터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의 포스터

유유의 가출
마르탱 게르가 가출하고 8년 뒤, 즉 아르노 뒤 틸이 나타났던 1556년에 대구의 한 양반가에서도 매우 유사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의 이름은 유유(柳游). 아버지는 현감, 조부는 사간, 증조부는 승지를 역임했으니 지방에서는 꽤 알아주는 가문이었습니다.
유유도 마르탱 게르처럼 부부 사이가 원만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혼 후 3년간 자식이 없자 그의 부친 유예원은 부부 사이를 책망했고 그래서 유유는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유유는 체구가 작고 수염이 없으며 음성은 여성 같았다는데 어쩌면 성호르몬적인 문제로 성적 결합이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기록에 남아있는 가출 이유는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가출한 그는 아버지 유예원이 사망했는데도 찾아오지 않았고, 그의 소식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563년 유유가 서울에 나타납니다. 춘수라는 첩과 정백이라는 아들을 둔 채였습니다. 그는 서울에 머물며 매부 이지의 집을 드나들었고, 이지의 연락을 받은 유유의 동생 유연이 그를 찾아옵니다.

유예원은 유치-유유-유연,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유치와 그 부인은 일찍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유유가 가출한 뒤 사실상 집안을 이끌던 것은 막내아들 유연이었습니다.
7년만에 만난 반가움도 잠깐. 형 유유를 데리고 대구로 내려가던 유연은 그가 가짜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유유'라고 주장하는 인물은 가족사를 꿰고 있었고 매부 이지도 그가 유유가 맞다고 단언했지만, 친동생인 그는 '감'이 왔던 모양입니다. 결국 유연은 대구집에 도착하기 전 형 '유유'를 관아에 넘깁니다. 그리고 진위를 가려달라고 요청합니다.

부인의 선택-베르트랑드와 백씨 
마르탱 게르와 유유, 두 재판은 모두 아내가 열쇠를 쥐고 있었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아내는 남편의 사소한 특징까지도 모두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베르트랑드는 꽤 일찍부터 진위 여부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훗날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쓴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를 비롯해 이 재판에 관해 관심을 가진 많은 이들은 적어도 아르노 뒤 틸과 잠자리를 같이했을 때,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라고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가짜 '마르탱 게르', 아르노 뒤 틸을 적극적으로 감쌌습니다. 또 아르노 뒤 틸은 결혼 초기 베르트랑드와 마르탱 게르가 겪었던 (두 사람만 알고 있을법한) 성생활의 어려움에 관해 말해 의심을 어느 정도 씻기도 했습니다. 베르트랑드와 가짜 남편은 꽤나 마음이 맞았던 게 분명합니다.

마르탱 게르의 재판을 다룬 판화

마르탱 게르의 재판을 다룬 판화

이런 상황은 유유의 재판에서도 비슷했습니다. 아내 백씨의 확인은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유유는 옥중에 있으면서 진위를 밝힐 방법이 없었다. 이에 ‘내가 장가든 첫날 아내가 겹치마를 입었기에 억지로 벗기려 하자 지금 월경이 있다고 하였다. 이 일은 타인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만일 아내에게 물어보면 거짓인지 진실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뒤에 그 아내에게 물었더니 유유의 말과 딱 맞았다." (『명종실록』 19년 3월 20일)

그런데 이상한 점도 있었습니다. 백씨는 옥에 갇힌 유유를 만나러 가지 않았습니다. 유유가 병을 이유로 보석이 허가돼 대구부 소속 관노의 집에 머물면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도 백씨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베르트랑드에 비하면 훨씬 소극적인 대응이었습니다. 물론 첩 춘수라는 존재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유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죠. 유유의 첩 춘수는 동생 유연이 죽이고 시신을 강에 유기했다고 주장했고, 백씨도 그에 동조해 시동생 유연을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김윤보 '형정도첩'

김윤보 '형정도첩'

당초에 유유의 진위를 가리던 이 사건은 순식간에 살인 사건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유연은 마지막까지 '형이 살아있을 수도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백을 주장하던 유연은 거듭된 고문에 결국 범행을 자백한 뒤 처형됐습니다.

그런데 유연이 죽고 15년이 지난 뒤 '진짜' 유유가 나타납니다. 그는 평안도에서 천유용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가짜 유유를 연기하고 감쪽같이 사라진 채응규라는 인물이 해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결국 15년 전 재판은 아무런 죄도 없는 유연을 억울하게 죽인 사법살인이라는 게 확인이 된 것이죠.

배경은 '쩐의 전쟁'
동생 유연이 형 유유를 죽였다는 혐의를 쓴 배경은 재산이었습니다. 3형제 중 맏형 유치는 이미 사망했고, 유유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면 집안의 재산은 막내인 유연이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죠.

당시 조선 사회는 균분 상속이 대세였습니다. 부모의 유산은 장자 뿐 아니라 아들딸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고르게 분배되었습니다. 다만 부모의 제사를 위한 몫이 따로 책정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균분 상속의 중요한 대전제는 딸에게도 1/n의 재산이 동등하게 나누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결혼을 하면 부인이 처가로부터 받아온 재산을 통해 가산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혼테크'로 재산을 늘린 대표적 인물이 퇴계 이황입니다.

이황의 아들 이준의 분재기 중 토지 내역. 이수건 『퇴계 이황 가문의 재산 유래와 그 소유형태』를 토대로 재정리. 아들과 딸의 구분없이 비교적 고르게 분배됐다.

이황의 아들 이준의 분재기 중 토지 내역. 이수건 『퇴계 이황 가문의 재산 유래와 그 소유형태』를 토대로 재정리. 아들과 딸의 구분없이 비교적 고르게 분배됐다.

다만 각자 가져온 재산에 대한 구분은 비교적 엄격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인이 자녀를 낳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엔 가져온 재산이 대부분 처가로 반환됐습니다. 양쪽 집안의 비즈니스의 측면도 있었던 것이죠.
퇴계 이황도 첫째 부인이 사망한 뒤 그녀가 가져온 재산의 반환 문제를 놓고 처가인 김해 허씨 집안과 소송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퇴계 이황의 농장 분포. 이황은 영남 일대 곳곳에 농장이 있었는데 이중 풍산, 영천, 의령 지역의 땅은 결혼으로 처가에서 받은 땅이다. [자료 이다미디어]

퇴계 이황의 농장 분포. 이황은 영남 일대 곳곳에 농장이 있었는데 이중 풍산, 영천, 의령 지역의 땅은 결혼으로 처가에서 받은 땅이다. [자료 이다미디어]

유유의 집안은 사정이 조금 복잡했습니다.
첫째 아들 부부가 자녀 없이 사망했고, 그 와중에 둘째 아들 유유까지 사라졌습니다. 곤란해진 것은 유유의 아내 백씨였습니다.

현재 맏며느리였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시부모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도, 남편의 재산도 그녀의 몫이자 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제사권은 언젠가는 시동생에게 넘어갈 처지였습니다. 장자가 죽으면 제사권이 동생에게 넘어가는 것을 '형망제급(兄亡弟及)'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시동생 유연은 아들도 있었습니다. 남편의 사망이 확인되면 그 재산도 남편의 혈육인 시동생 쪽에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백씨로서는 친정에서 가져온 약간의 재산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넘어갈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백씨의 입장에선 유유가 돌아온 것보다는 '남편'이 다시 생겼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그녀는 불안에 떨지 않고 재산을 유지한 채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러니까 채응규가 진짜 남편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백씨가 옥에 갇힌 유유를 연기한 채응규를 굳이 만나러 가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사라지자 시동생이 남편을 죽였다며 펄펄 뛴 이유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또 채응규가 신혼 첫날밤의 겹치마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아 백씨는 이 가짜 소동에 깊숙이 관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백씨가 어디까지 관여했는지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체포된 채응규가 압송 도중 자결해 사건의 진상은 베일 속에 가려졌습니다.
훗날 돌아온 유유는 아내의 이런 행동을 알게 된 뒤 격분했고, 고향 대구로 돌아온 뒤 죽을 때까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사실 모든 화근의 원인은 본인의 가출이었지만…

녹천 이유의 조부인 장영공 이회가 재산을 분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분재기. [중앙포토]

녹천 이유의 조부인 장영공 이회가 재산을 분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분재기. [중앙포토]

장자 상속, 좁아진 여성의 위치
베르트랑드나 백씨가 위험천만한 도박에 협조한 배경에는 불안한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있습니다.
중세 프랑스는 조선보다 여성의 권리가 낮아 재산권은 거의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홀로 아들을 키우던 베르트랑드는 남편이라는 존재가 필요했고, 남편의 삼촌에게 맡겨야 하는 자신의 미래가 불안했을 것입니다.

여성의 균분상속을 보장했던 조선도 점차 달라졌습니다. 사림이 정권을 잡은 선조 이후로는 장자 우대 상속이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실학자 정약용은 균분 상속 때문에 유력한 집안도 종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균분 상속은 세대를 거듭하며 계속 나누게 되니 가문의 재산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아직 개간할 땅도 많이 남아있다든지 확장이 가능한 시대라면 괜찮습니다. 균분상속을 해도 그것을 종잣돈으로 삼아 재산을 불릴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황만 해도 수십명의 노비를 물려받아 300여명까지 늘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서구의 제국처럼 식민지나 새로운 땅을 개척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 한계에 다다르기 마련입니다. 확장이 불가능해지는 순간 균분 상속으로는 대규모 자산을 지속해서 유지하기는 어려워지는 것이죠.

장자 상속이 일찍 자리잡은 유럽에서는 둘째나 셋째 아들은 유산을 거의 상속받지 못했다. 이들중 상당수는 십자군 전쟁이나 신대륙 개척 같은 일에 뛰어들어 신분을 상승시키려 했다.

장자 상속이 일찍 자리잡은 유럽에서는 둘째나 셋째 아들은 유산을 거의 상속받지 못했다. 이들중 상당수는 십자군 전쟁이나 신대륙 개척 같은 일에 뛰어들어 신분을 상승시키려 했다.

이런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 중기부터 장자 위주 상속으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문의 위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런 분위기 속에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가 현저하게 낮아지게 됩니다. 가문에서는 더이상 결혼하는 딸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처가에서 재산을 가져오지 못하니 여성의 발언권은 약해졌고, 조선에서 대세였던 결혼 후 처가살이도 시가살이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장자 우대 상속제는 다시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문중을 상대로 재산 소송을 벌이는 일이 증가하고, 한 자녀 가정의 증가로 딸이나 사위와의 관계가 가까운 경우가 늘어나면서 오는 자연스러운 흐름 같습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요.

※이 기사는 권내현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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