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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토론] 불법 정치자금 고리 끊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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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기업과 정치권.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인가. 선거 후면 되풀이되는 불법 정치자금의 회오리가 이번에도 예외없이 정계와 재계를 강타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줄줄이 잡혀들어가고, SK 손길승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다른 기업들도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제는 더욱 멍들고 있다. 불법 정치자금과 정경유착,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인가.

<참석자>
▶김수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소장
▶남경필 한나라당 국회의원.전 대변인
▶이규황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가나다 순)
사회 = 김왕기 논설위원

▶사회=수없는 우여곡절과 비판을 겪으면서 아직도 기업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과 정경유착의 부패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이=정경유착의 패러다임이 과거와는 달라졌습니다. 과거 정부가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시절, 정치자금은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에서 제공된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시장이 개방되고 글로벌 스탠더드가 도입되면서 대가를 바라고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형태는 줄었습니다. 다만 정치권에서 법정 기부 한도액을 초과하는 돈을 달라고 자꾸 손을 벌리니까 거절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료'라고 보면 될 겁니다.

▶남=현실적으로 선거나 정치에는 돈이 드는데 이 돈을 마련할 수 있는 합법적 통로는 제한돼 있으니, 정치인 입장에서는 기업 등에 손을 벌리게 되는 것이지요.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이런 고비용 정치구조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불법 정치자금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아직도 정치 권력에 의해 운명이 좌우될 정도로 영향을 받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돈을 갖다 주는 것이고요.

▶사회=불법 정치자금 제공이나 정경유착의 행태가 나아지기는 한 겁니까.

▶남=1990년대 초반까지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의식과 수준이 더 빨리 바뀌다 보니 별로 안 나아진 것처럼 비쳐지는 면도 있습니다.

▶김=당사자들은 달라졌다지만 과연 얼마나 바뀌었는지 의문입니다. 정경유착은 정치권과 재벌 공동의 책임입니다. 기업은 정부가 자신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데 대한 방어막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치권에 접근했고, 정치권은 이를 이용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정치와 기업이 모두 멍들고 있습니다.

▶사회=정치권이 은밀하게 돈을 요구하면 기업이 거부할 수 없나요.

▶이=과거 개발 연대에는 기업들이 회계상 투명하지 못한 관행이 있었는데, 이게 누적되다 보니 규모가 커져서 일시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기업들은 털려고 노력했지만 외환위기로 경영난이 가중되면서 기회를 놓쳐 지금도 부담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과거의 업보 때문에 기업들이 정치권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특혜를 기대하기 때문에 음성적 정치자금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요.

▶남=기업으로서는 조그만 혜택이라도 받으면 큰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정치자금을 주는 것으로 봅니다. 달라진 점이라면 예전에는 개별사안, 즉 특정 이권사업을 위해 정치자금을 줬다면 지금은 상대적으로 보험 성격이 강할 것입니다. 대선 때만 해도 후보 지지율 변화에 따라 들어오는 돈이 달라지더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이=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가 기업에 특별히 해줄 만한 것이 많지 않습니다. 정치자금을 준다면, 특혜가 아니라 제발 규제 좀 하지 말라는 뜻에서 준다는 게 타당할 겁니다.

▶사회=실제로 기업 입장에서 정치권이 어느 정도 손을 벌리나요.

▶이=선거 때 법정 한도를 지키는 정치인이 거의 없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자기 돈 아니면 다른 데서 구하는 것일텐데, 중소기업이나 개인은 힘들 것이므로 결국 대부분 대기업이 대상 아니겠습니까.

▶남=물론 대선 자금 등은 정당에서 먼저 손을 벌리는 경우도 있지만, 보험 성격으로 기업이 스스로 가져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사회=도대체 선거 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듭니까. 법정 기부금이나 후원금도 적지 않을 텐데, 이것으로는 부족한가요.

▶남=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1인당 법정 한도는 1억원 안팎입니다. 홍보물 하나 괜찮게 만들려면 1억원은 듭니다. 여기다 사람도 필요하고…무슨 말인지 알지 않습니까. 3억~5억원이면 아주 절약한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10억, 20억원 넘어간다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사회=최근 일각에서는 과거의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고해성사를 하면 사면을 해주고, 앞으로의 불법행위는 엄벌하자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그냥 덮고 넘어갈 수는 없지요. 앞으로가 잘 되려면 일단 과거 행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것이 사태해결의 첫걸음입니다. 고백을 하든, 검찰이나 특별검사가 조사를 하든 일단 과거 잘못을 밝혀야 합니다. 처벌 문제는 그때 가서 국민 여론 등을 들어봐야 할 것입니다. 사견입니다만 기업인에 대한 처벌은 국민경제나 국익 차원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신 정치인은 좀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 등을 면밀하게 검증해 처벌할 것은 처벌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남=동감입니다. 고해성사도 무조건적 사면이 아니라 철저한 검증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공정성 등을 감안하면 특검이 좋다고 봅니다. 처벌 수위에 관해서는 정치권에서 뭐라 말하기 힘들 겁니다. 단 지금의 법 잣대로 들이대면 아마 벗어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따라서 정도를 봐서 결정해야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기업 쪽은 결국 과거의 분식회계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 문제를 모두 까발릴 경우 국가경제와 대외신인도 등에 적지 않은 충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지사는 국민적 동의하에 사면하고 앞으로 발생할 분식회계나 불법 정치자금은 엄하게 처벌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사회=불법 정치자금이 안 없어지는 데는 법이나 제도적 맹점은 없습니까.

▶김=공무원이 돈을 받으면 뇌물죄가 적용돼 엄벌을 받는 데 반해 정치자금법상 정치인은 훨씬 약한 처벌을 받습니다. 아예 정치활동을 못할 정도로 강력히 처벌해야 합니다.

▶사회=뿌리 깊은 정경유착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무엇보다 돈이 많이 드는 정치나 선거 풍토가 달라져야 합니다. 동시에 정치에는 어느 정도 돈이 든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합법적인 지원 규모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일부에서 제기됐던 '법인세 1%'를 정치자금화하자는 방안도 가능할 겁니다. 일부에서는 아예 당내 경선도 정부가 관리하도록 하면 어떠냐는 의견까지 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돈이 적게 드는 측면에서만 보면 대선거구제로 가야 합니다.

▶김=사회 전체가 맑아져야 합니다. 자금세탁방지법 등을 강화하는 것도 음성적 돈 흐름을 차단하는 길입니다. 정치자금의 모금 한도는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단, 정치자금 양성화에는 정치자금 입출금의 투명성 확보가 전제돼야 합니다.

▶남=문화운동을 벌이는 등의 방법으로 의식 변화도 병행돼야 합니다. 유권자도 달라져야 합니다. 밥 한끼 얻어먹는 게 무슨 잘못이냐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고비용 선거구조와 불법 정치자금 문제는 해소되기 어렵습니다. 물론 정치권부터 먼저 바뀌어야죠. 극단적으로 말해 정치판은 하수종말처리장처럼 돼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안됩니다.

▶이=선거운동 양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조직 위주, 청중 위주의 선거운동 방식은 바꾸고 정당구조도 디지털 시대에 맞게 개편돼야 합니다. 정치자금의 범위도 좀더 현실적으로 재조정하되, 이 돈이 투명하게 사용됐는지를 보기 위해 기업처럼 정당도 외부의 회계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사회=제도만 바뀐다고 우리 정치권이 달라질까요.

▶남=과거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의 개선책만 논의해서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일단 지금까지의 잘못에 대해 정치인들이 고해성사를 하고, 이 부분을 특검제를 통해 검증하는 방식으로 털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만델라가 전개한 '화해의 운동'을 도입하자는 거지요. 이런 씻김굿을 한 후 국고보조, 선거공영제 등 새로운 제도를 적용하면 정치자금 문제도 상당한 진전이 있을 겁니다.

대신 앞으로 불법 정치자금이 적발되면 아예 출마를 못하게 하는 등 강력한 제재가 필요합니다. 각 정당들은 당리당략을 떠나 이번만은 꼭 불법 정치자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과거를 털고 넘어가자는 데는 동감합니다. 정치권이 경제의 발목을 잡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정치자금입니다. 이 문제는 한국 기업의 대외신인도로 연결되고 세계시장 진출에도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정치자금 문제가 깨끗해지면 국회의 정책기능도 되살아날 겁니다. 또 정치인들이 법을 지키는 풍토가 조성되면 우리 사회의 법치 질서 체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입니다.

정치자금 문제가 해결되려면 정부 규제를 완화해 기업이 정부 눈치 안보고 사업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하며, 기업이나 유권자 국민도 투명해져야 합니다.

▶김=정경유착과 불법 정치자금 문제는 환부가 곪을 대로 곪아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데 대해 범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최근 대선자금을 둘러싸고 폭로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차제에 밝힐 것은 밝히고 조사할 것은 조사해 정리해야 합니다.

정치권이 자발적으로 못한다면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 후 제도적.법적 문제가 보완돼야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재벌의 지배구조도 개선되어야 합니다. 특혜든 보험이든 기업 오너 등이 마음대로 기업 돈을 빼돌릴 수 없도록 해야죠.

정리=홍승일 기자<hongsi@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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