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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에 주먹날린 女시장...그 아빠에 그 딸, 요지경 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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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두테르테 옆 두테르테.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딸 사라 두테르테다. 2019년 한 행사에 참석하는 부녀. 로이터=연합뉴스

두테르테 옆 두테르테.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딸 사라 두테르테다. 2019년 한 행사에 참석하는 부녀. 로이터=연합뉴스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정계 은퇴엔 다 계획이 있다. 큰딸이자 자신의 후계자인 사라 두테르테-카피오의 대권 도전을 위한 레드카펫을 깔아주겠다는 게 그 계획의 핵심이다. 성별만 다를뿐 정치 스타일이 똑닮은 부녀의 권력 세습 계획이 구체화하고 있다.

아버지 두테르테는 “히틀러가 300만명을 학살했듯 나도 마약사범 300만명을 죽이면 기쁘겠다”며 실제로 6000여명이 넘는 마약 범죄자를 제대로된 사법 절차 없이 사형시켰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향해 지면에 옮길 수 없는 욕설을 하는 등 막말 어록도 길다. 딸은 보다 행동파다. 2011년 자신이 시장인 필리핀 남부 다바오 시의 철거민촌을 방문한 자리에서 남성 경찰관의 얼굴에 기습 펀치를 날렸다. 철거민의 권리를 제대로 지켜주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경찰관은 병원으로 직행했다. 철거민은 환호했지만 공권력은 무너졌다.

사라 두테르테가 2018년 철거 현장을 책임지는 경찰관에게 주먹을 휘날리는 모습. 필리핀 현지 매체인 ANC의 유튜브 계정 뉴스 캡처.

사라 두테르테가 2018년 철거 현장을 책임지는 경찰관에게 주먹을 휘날리는 모습. 필리핀 현지 매체인 ANC의 유튜브 계정 뉴스 캡처.

아버지 두테르테는 당초 부통령 직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필리핀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금지하기 때문에 생각해낸 꼼수로 읽혔다. 부통령직 수행 뒤엔 다시 대통령에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필리핀 국내 및 국제사회의 공통된 예상이었다. 단순한 권위적 스트롱맨 대통령을 넘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과 같은 독재 권력을 구축하겠다는 포석으로 읽혔다. 푸틴이 대통령에서 총리를 거쳐 다시 대통령으로 돌아오며 ‘차르(황제)’의 길을 걷는 것과 같은 패턴이다. 두테르테의 이같은 구상은 단순한 권력욕뿐 아니라 퇴임 뒤 그의 안위를 우려하는 마음에서도 비롯됐다. 그의 통치 스타일에 대한 국내 일각의 불만과 국제사회의 비판이 심상치 않아서다. 반대파가 권력을 잡으면 두테르테는 수감 생활을 면할 수 없으리란 예상이 팽배하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지난 2일 급작스럽게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부통령엔 자신이 아닌 크리스토퍼 고(오른쪽) 의원이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신화통신

두테르테 대통령이 지난 2일 급작스럽게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부통령엔 자신이 아닌 크리스토퍼 고(오른쪽) 의원이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신화통신

두테르테는 그러나 허를 찔렀다. 자신은 정계를 은퇴하고 대신 딸에게 대권 도전의 길을 열어주는 카드를 택했다. 로이터는 3일 “두테르테는 정계 은퇴를 밝히면서 필리핀 현지 기자들이 ‘그럼 이제 (딸인) 사라가 (대선에) 가는 건가’라는 질문을 받고 ‘예스’라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두테르테는 그러나 동시에 “딸도 출마를 실제로 고려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며 “우리는 서로 정치 얘기를 안 한다”고 눙쳤다.

딸 사라는 현재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2010년 물려받은 다바오 시의 시장직 연임에 도전하겠다는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시장직 자체도 부녀가 주고받기로 독점해왔다. 아버지가 2010년 시장 3회 연임 제한 규정 때문에 시장을 못하게 되자 딸 사라를 대신 출마시켜 시장에 당선시켰고, 아버지는 부시장직을 꿰찼다. 당시 사라의 나이는 32세로 최초 여성이자 최연소 시장으로 기록됐다. 그 다음 시장 선거에선 아버지가 시장, 딸이 부시장직으로 자리를 바꿨다. 아버지가 대통령 선거에 당선한 2016년, 딸 사라는 99.6%의 득표율로 시장에 당선했다.

2019년 같은 당 동료의원의 유세장에서 찬조 연설 중인 사라 두테르테. 로이터=연합뉴스

2019년 같은 당 동료의원의 유세장에서 찬조 연설 중인 사라 두테르테. 로이터=연합뉴스

아버지 두테르테는 76세, 딸 사라는 43세다. 걸어온 길도 판박이다. 부녀 모두 변호사를 거쳐 시장 당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사라는 다바오 시장에 당선된 뒤 현지 매체에 “아버지는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밝혔고, 2018년 ‘아버지의 날’엔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게 ‘변호사나 의사 또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이가 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가르치셨고, 나는 그 엄격함에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아버지 역시 2017년 “차기 대통령감으로 사라보다 더 나은 후보자를 찾을 수 없다”고 공공연히 권력 세습의지를 밝혔다. 2018년엔 아예 “왕조가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두테르테 왕조’를 암시한 발언으로 해석됐다.

아버지 두테르테의 막말에 딸 두테르테가 방어진을 친 경우도 여럿이다. 대표적 케이스가 2018년, 두테르테가 자신의 텃밭인 다바오 시의 성범죄 피해 사례를 두고 “그 곳에 워낙 아름다운 여성이 많아서 그렇다”는 말을 한 것이다. 여론이 악화하자 두테르테 측은 “농담이었다”고 했지만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다바도 시장이었던 딸 사라는 “(아버지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묻겠는데, 그러는 당신은 다바오시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라고 항변하고 나섰다.

현재로서 딸 사라는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두테르테 부녀의 대통령직 연임이 가시화할 가능성은 상당하다. 딸이 집권해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을 가능하게 한 뒤 아버지가 또 대권을 잡는 시나리오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사라는 2007년 동료 변호사이자 대학 동기인 마나세스 카피오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남편 카피오의 집안은 대법관을 배출하기도 한 사법권력의 핵심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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