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씨엘의 괴짜 아빠…이젠 영화배우 도전한다

중앙일보

입력 2021.09.28 05:00

업데이트 2021.09.2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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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가수 씨엘(본명 이채린) 아빠인 이기진 서강대 교수가 26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실험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그림은 이 교수의 작품. 김성룡 기자

가수 씨엘(본명 이채린) 아빠인 이기진 서강대 교수가 26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실험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그림은 이 교수의 작품. 김성룡 기자

 걸그룹 2NE1의 리더이자 가수 씨엘(CL·본명 이채린)의 아빠 이기진(61)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는 취미 부자다. 그림 그리기부터 글쓰기, 골동품 모으기, 영화 보기, 요리까지 그가 좋아하는 일은 과장을 보태 끝이 없다. 그런데 이른바 ‘본캐’(본캐릭터)는 물리학자인 그가 자처하는 ‘부캐’(부캐릭터)는 파리지앵이다. 박사 학위를 받고 “파리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로망 하나로 아내와 한 살 된 딸 채린까지 데리고 파리의 다락방에서 2년간 살았던 게 그 시작이었다.

주말엔 갤러리, 딸 집에서 요리

이기진 서강대 교수가 26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실험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기진 서강대 교수가 26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실험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딸들을 위해 동화책도 직접 만들었던 그가 이번엔 20번째 책 『우주 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를 출간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전까지 약 10년간 매년 방학 때마다 서로 초대해 프랑스와 한국을 오갔던 프랑스 동갑내기 물리학자 친구 제랄과 함께한 프랑스 생활을 담았다. 책 속의 삽화는 늘 그렇듯 직접 그렸다.

지난 26일 서울 서촌의 갤러리 ‘창성동 실험실’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갤러리를 채운 알록달록 그림과 곳곳에 놓인 철제 로봇은 그가 직접 그리고 만든 작품이다. 지난 2007년 폐가 같던 연면적 99㎡(30평) 짜리 한옥을 사서 고친 이 갤러리는 평소엔 주말에 요리도 하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아지트이자 제랄이 한국에 방문할 때면 숙소로 내어주는 곳이다.

서울 종로구 창성동 실험실. 갤러리 입구엔 이기진 교수가 지금까지 출간한 책들과 함께 요리에 진심인 그답게 파스타 면과 양파가 놓여있다. 김성룡 기자

이기진 서강대 교수가 운영하는 '창성동 실험실'에 그가 직접 그린 그림 엽서가 놓여 있다. 김성룡 기자
이기진 교수가 운영하는 '창성동 실험실'에 놓여 있는 방명록. 김성룡 기자

그의 일상은 단순하다. 평일엔 보통 아침 6시에 일어나 김밥 한 줄 사 들고 학교로 출근한다. 일과는 오전 중에 마치려고 하는 편이다. 오후에 이런저런 일을 본 뒤엔 한강 따라 한 시간을 걸어서 이태원 동네 펍에 들러 맥주를 마시고 집에선 책을 본다. “책 보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그의 침대엔 늘 책이 5~6권 뒹군다. 주로 에세이나 소설이다. 주말엔 걸어서 5분이면 닿는 딸들의 집에서 요리해주거나 창성동에서 시간을 보낸다.

“부모 잔소리는 공해”

이기진 서강대 교수가 26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실험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기진 서강대 교수가 26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실험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물론 평생 이렇게 살았던 건 아니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지냈던 10년, 그리고 한국에서의 10년 꼬박 20년간 밤낮 일에만 몰두했었다. 그러다 50살이 되니 온몸이 아프고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운동을 시작하고 책을 보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원동력이었다”면서 “40대는 최악이었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지금이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그는 본업에 대해선 거의 말하지 않는다. 전공인 마이크로파를 굳이 묻는 이들에겐 ‘휴대전화나 전자레인지의 주파수’라는 정도만 말한다. 그 이상은 쉽게 설명하기 힘들어서다. 그래도 자랑 좀 해달라는 기자에겐 “3~4년 전에 카메라를 이용해 혈당을 측정하는 기술을 처음 개발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영상장치를 이용해 용액의 농도를 측정하는 자체가 획기적인 방법”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요즘 하는 연구는 카메라로 혈당을 재는 일이다. “광학카메라로 마이크로파를 보는 일”을 설명하던 중 기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재빠르게 간파한 그의 한마디. “아유, 그러니까 물리학 이야기는 안 한다고 했잖아요.”

알고 보면 그의 본업과 남다른 취향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다. 아버지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였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태양전지와 복사기를 만들었다”는 이병혁 교수가 그의 부친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물리학을 했지만, 정작 그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가장 멋있었던 아버지는 어두워질 때까지 소설책을 읽던 모습이었다. 은퇴 후 아버지는 ‘배를 만들어 보물섬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을 찾아 전남 신안군 장산면 마진도에 내려가 배를 만들고, 10년간 섬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이기진 교수가 26일 '창성동 실험실'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기진 교수가 26일 '창성동 실험실'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K팝 스타의 아버지로서 자식 교육의 방침은 뭘까. 그는 “부모는 자식과 같은 나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잔소리는 공해”라고 강조했다. 딸 채린이 연습생이던 고2 때 갑자기 자퇴하겠다고 했을 때 이유도 묻지 않고 ‘OK’ 한 것도 “부모와 자식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신뢰”라는 그의 가치관 때문이었다. 그는 “모든 걸 풀 수 있는 열쇠는 본인의 열정”이라고 했다. “단어도 본인이 외워야지, 부모가 외워주지는 못하잖나?”라면서.

배우계약서에 사인…그 다음은?

조만간 그의 ‘부캐’는 하나 더 늘게 생겼다. 영화배우다. 지난 7월 장편독립영화 배우계약서에 사인하고 연기 수업도 받았다. 서촌의 러브스토리를 담는 이 영화에서 “조연에 조연에 조연으로 세 번째 조연 정도 된다”는 그의 역할은 책방 주인을 짝사랑하는 중년의 갤러리 사장. 코로나19로 미뤄졌지만 늦어도 연내엔 촬영을 시작한다. 이쯤 되면 ‘본캐’와 ‘부캐’가 헷갈릴 만도 하다. “작은 부엌만 있으면 뭐든지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그는 ‘요리 유튜버도 잘 어울린다’는 기자의 말에 눈빛을 반짝였다. “오, 그래요? 파리의 다락방에서 요리를?” 그의 다음 ‘일탈’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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