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원칙 가르치는 곳 원칙 버리면 경쟁력 잃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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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외국어대 직원 노조가 6일 파업을 철회했다. 직원 인사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4월 6일 파업에 돌입한 지 215일 만이다. 대학 노조 중에서도 최강성으로 알려져 있던 한국외대 노조가 결국 백기를 든 것이다. 파업사태가 종결된 데는 평생학자인 박철(57.사진) 총장의 집념과 고뇌가 있었다. 그는 노조에 맞서 "이번에는 어떤 경우든 원칙을 지키겠다"며 노조와 타협하지 않고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고수했다. 노조가 박 총장의 집까지 몰려가 시위를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7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대 총장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노조 파업이 끝났는데 어려운 일이 많았겠다.

"7개월이 마치 7년 같았다. 처음엔 파업이 두세 달이면 끝날 줄 알았지 이렇게 오래 끌 줄 몰랐다. 대학 사회가 무한경쟁을 하고 있고 외국어대의 장점을 살려 세계에 더 많은 인재를 내보내야 하는데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안타깝다. 사실은 지금도 얼떨떨하다. (잔뜩 쌓인 책상 위의 서류들을 보며) 이제부턴 정말 일을 해야겠다."

-박 총장이 취임한 지 두 달도 안 돼 파업이 시작됐는데 왜 그런가.

"2월 28일 취임하자마자 노조와 단체협상을 시작했다. 노조의 단체협약안을 보니 기가 막혔다. 노조위원장이 직원의 인사.징계권을 유지하고, 비정규직을 무조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내용이었다. 총장이 직원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대학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노조는 총장 취임 초기에 파업을 하면 들어줄 거라고 본 것 같다. 나도 처음엔 당황했다. 어떻게 학교를 운영할지도 막막했다."

-하지만 파업 초기부터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내세웠는데.

"노조가 파업할 권리가 있다면 사측의 권리는 무노동 무임금이다. 나는 평교수 시절에도 일단 학점을 주면 고쳐주지 않았을 정도로 원칙주의자다. 대학은 원칙을 가르치는 곳이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다."

-파업이 길어지면서 학생들이 큰 불편을 겪지 않았나.

"처음엔 파업을 빨리 끝내라는 지적이 있었다. 노조원들이 우리집 앞으로 몰려와 동네 주민들까지 괴롭힐 때는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학생.교수.동문.학부모들 모두 노조의 요구가 부당한 것을 알고 불편을 감수하며 참아줬다. 학생들은'직원들도 개혁에 동참하라'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지키라'며 1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왔다. 학생.동문.교수 모두의 승리다."

-노조와 타협할 생각은 안 해봤나.

"노조가 인사권과 징계권을 갖고 있는 대학은 우리 외대밖에 없다. 국내 대학 직원 노조 중 가장 강성인 이유다. 노조는 그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외대는 변해야 산다. 이걸 양보하면 외대가 부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파업이 길어진다는 부담감 때문에 본질적인 문제를 덮을 수는 없었다."

-학생들도 노조를 외면했는데.

"대학은 공장과 다르다. 대학 직원에게는 학생이 고객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직원들은 학생에게 어떤 서비스를 하든 승진에 지장이 없었다. 오직 위원장에게만 잘 보이면 승진하고 보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학생.직원 삼두마차가 조화를 이뤄야하는데 한쪽이 따로 논 것이다. 학생들도 이걸 고쳐야 학교가 발전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박 총장을 강성으로 보는 사회 일각의 시선도 있는데.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원칙을 지키면 '강성'으로 보는 우리 사회 여론이 잘못됐다. 그러면 누가 원칙을 지키고 옳은 일을 하겠나."

-총장이 해임된 동덕여대 등 여러 대학이 노조와 갈등을 빚고 있다.

"이번 사태의 교훈은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와 소통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조급하게 타협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남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7개월간 임금을 못 받은 노조원들의 대책도 마련 중이라는데.

"은행의 저금리 대출을 주선하는 등의 방안을 찾고 있다."

-학교 운영 방향은.

"이제야 총장이 된 기분이다(웃음). 파업 사태를 5대 명문 사학으로 재도약하기 위한 계기로 삼겠다. 12월 4일엔 동문들이 학교 발전을 위해 후원금을 내는 '외대 가족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캠페인도 벌일 예정이다. 학생을 감명시키는 대학, 경쟁력 있는 대학을 만드는 데 힘쓰겠다."

글=양영유.한애란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 박철 총장=1949년생. 경동고.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를 졸업한 뒤 스페인 마드리드국립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85년부터 한국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4년 국내 처음으로 소설 '돈키호테'를 완역해 출간했다. 한국서어서문학회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장, 아태지역 외국어대총장협의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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