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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추석 뒤 이혼, 형제간 송사 급증…언제까지 놔둘 건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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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10면

[SPECIAL REPORT]
코로나가 바꾼 추석

‘큰엄마의 미친 봉고’의 장면. [중앙포토]

‘큰엄마의 미친 봉고’의 장면. [중앙포토]

여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유씨네’ 집안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명절 때마다 전을 부치고 차례·제사상을 준비하던 여자들이 단체로 부엌을 박차고 나가 사라졌다. 반란을 주도한 이는 유씨 집안 맏며느리였다. 그는 결혼을 앞둔 젊은 예비 며느리까지 모두 봉고차에 태워 탈출을 감행했다. 여자들은 큰아버지(맏며느리의 남편)의 신용카드를 긁으면서 쇼핑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사 먹는다. 유씨네 집안에선 난리가 났다. 특히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받아볼 때마다 큰아버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남자들은 “여자들 때문에 집안 제사가 사라졌다.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다”고 한탄하는 등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실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지난해 1월 개봉한 영화 ‘큰엄마의 미친 봉고’ 줄거리다. 영화는 명절과 제사를 둘러싼 낡은 가부장적 문화, 힘든 ‘시월드’의 현실을 비꼰다. 막내며느리가 될 20대 예비신부는 유씨네 집안의 가부장적 문화를 접하고 파혼을 고민하는 장면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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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엄마의 미친 봉고’의 장면. [중앙포토]

‘큰엄마의 미친 봉고’의 장면. [중앙포토]

영화에선 다소 과장됐지만 즐거울 것만 같은 명절 풍경의 이면에는 차례와 제사 준비에 따른 과도한 육체적 가사노동과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이 실제 적지 않다. 여성, 그중에서도 기혼 여성들에게 명절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이벤트다. 일부에선 ‘명절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부속 기사 참조) 특히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들은 명절과 제사에 대해 기성세대와 큰 인식 차를 보여준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로 명절과 제사 참석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지긴 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도 명절과 제사에 반드시 고향을 찾아가거나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의무감이 이전 세대들에 비해 옅어진 것이 사실이다. 2019년 추석을 앞두고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과 구직자 11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절반 이상(53%)이 추석 연휴에 고향에 갈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특히 MZ세대에 해당하는 20, 30대는 각각 53.8, 56.9%가 귀향 계획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 홀로 추석 명절을 보내는 일명 ‘혼추족’이 상당히 많았다.

당시 20~30대가 주로 이용하는 또 다른 포털 사이트 취업 게시판에서는 ‘내가 명절에 혼자 지내는 이유’라는 글에 다양한 댓글이 붙었다. 댓글 중에는 ‘취업과 결혼에 대한 친인척들의 과도한 관심이 싫다’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성묘·제사가 부담스럽다’라거나 ‘차례 음식 준비 등 부엌 일이 귀찮다’는 댓글도 적지 않았다. 한 여성 네티즌은 “세상이 변했다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많은 가정에선 명절 때 여성만 고생한다. 엄마 세대처럼 살기는 싫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대한민국에서 언제쯤 제사가 없어질까요”라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실제로 2년 전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제사를 없애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신과 전문의인 김동욱 박사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데다 공정에 대해 민감한 MZ 세대는 명절 때 나타나는 남녀 간 차별, 불평등에 대해 과거 세대가 어쩔 수 없이 짊어졌던 가족 전체를 위한 희생이라는 개념보다는 반감이 더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명절 자체를 바라보는 남녀와 세대 간 인식 차이뿐 아니라 제사 자체를 둘러싼 다양한 갈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제사를 놓고 가족 간 다툼이 벌어지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지난해 추석 연휴가 시작된 9월 30일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한 아파트에서는 60대 후반의 남성이 자신의 누나와 매형에게 흉기를 휘둘렀고, 매형은 사망했다. 다툼의 원인은 명절 차례와 제사 문제 때문이었다. 경찰 수사 결과 가해자는 평소 누나 부부가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지만 제사 문제 등으로 가족 간 다툼은 그리 찾아보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제사를 누가 지내느냐를 놓고 형제간 다툼이 벌어지는 일이 적지 않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60대 B씨는 5형제의 맏이다. 그는 2019년 추석 때 형제들과 제사 문제를 상의하다 크게 다퉜다. “너희 형수가 지병으로 건강이 갈수록 안 좋아지니 다음 제사부터는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면 어떻겠냐”고 했다. 하지만 모두 냉담한 반응뿐이었다고 한다. 서로 어려운 사정 등을 얘기하며 핑계만 댈 뿐 누구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이에 B씨는 “이럴 거면 다음부터 제사에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며 언성을 높이다 결국 형제간 얼굴을 붉히며 다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혼·유산 문제 등 민사 문제를 많이 다뤄 온 이형상 변호사는 “2008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가계 계승의 법적 근거가 사라졌지만 일반적으로 제사는 집안의 장남이 모시는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면서도 “제사를 형제 중 누가 모시느냐 문제를 두고 법적인 다툼을 벌이는 집안도 있다”고 했다. 현행 민법에는 제사 주재권에 대한 명백한 규정은 없다. 다만 ‘분묘 등의 승계’(제1008조 3항)에 따라 묘에 속한 땅과 농지, 제구(제사 지내는 기구)의 소유권은 제사 주재자가 승계한다고 돼 있다. 제사 주재자가 관련 집안 재산도 승계하도록 한 것이다. 이 변호사는 “반대로 재산 승계 문제 때문에 제사를 서로 지내려고 다투다 법정까지 오는 경우도 있었다”라고도 했다.

명절 차례와 제사 문제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 중 가장 흔한 것이 부부 간 갈등이다. 특히 명절 직후 이혼율이 높아지는 현상은 이런 갈등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설날과 추석 이후의 달인 3월과 10월 11월 이혼 건수는 직전의 달보다 항상 증가했다. 2018년 2월 7700여건이었던 이혼 건수가 3월 9100여건으로 늘었고, 9월 7800여건이었던 게 10월 1만 500여건 11월 1만 1100여건으로 증가했다. 2019년에도 2월 8200여건에서 3월 9100여건으로 늘었고, 9월 9000여건에서 10월 9900건으로 증가했다. 최근 5년간을 기준으로 하면 명절 직후 다음 달 이혼율이 평균 11.5%씩 증가했다. 이형상 변호사는 “명절을 보내는 과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장모와 사위의 갈등이 벌어지고 여기에 기존에 갖고 있던 부부간의 갈등까지 더해져 보통 명절 이후 이혼을 결심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기제사가 아닌 추석, 설 명절에는 과도한 차례상 차림 등을 최대한 지양해 가족 간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다”며 “차와 간단한 음식만 올렸던 차례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등 명절 문화를 더 과감하게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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