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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탕·국 없는 종가 차례상 “간소하게 차리는 게 전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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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09면

[SPECIAL REPORT]
코로나가 바꾼 추석

퇴계 이황 종가의 간소한 설 차례상. [사진 한국국학진흥원·칠곡군]

퇴계 이황 종가의 간소한 설 차례상. [사진 한국국학진흥원·칠곡군]

“원래 차례상은 간소하게 차리는 게 전통이에요. 추석 차례상을 송편, 제철 과일, 포 이렇게 간단하게 차리는 것은 결코 무례한 일이 아닙니다.”

제례 문화를 연구해온 한국국학진흥원의 김미영 수석연구위원은 설날엔 떡국을, 추석엔 송편을 올리는 것 외에 기제사와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송나라 때 주희가 집대성한 유교 제례 문화의 지침서 『주자가례』에 따르면 명절 차례란 설에는 새로운 해가 밝았음을, 추석에는 한해 농사를 무사히 지었음을 알리는 일종의 의식이다. 그래서 설날과 추석에는 제사를 지낸다고 하지 않고 예를 올린다고 한다. 쉽게 말해 기제사가 돌아가신 한 조상에게 정성껏 음식을 대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차례는 간단한 음식과 함께 조상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김 위원은 “차례는 식사를 올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물·탕·국은 필요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제철 과일과 포·술 정도만 해도 충분하고, 제철 과일도 따로 담지 않고 한 접시에 담아도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통을 지키는 종가의 명절 차례상은 간소하다. 조선 시대 대표 성리학자인 명재 윤증(1629~1714) 선생의 파평 윤씨 종가 명재고택의 추석 차례상에는 포와 과일 3가지, 백설기, 차만 올라간다. 때에 따라 식혜가 추가되기도 한다. 명재 선생의 13대 종손 윤완식씨는 “차례상은 음식상이 아니다”며 “다과상이기 때문에 과일하고, 포 등만 간단하게 차리고 있다”고 말했다. 상에 올리는 음식의 양도 많지 않다. 차례상 크기부터 가로 99㎝, 세로 68㎝로 작다. 이 위에 올라가는 목제기에 대추와 밤을 낮게 쌓고, 배 또는 감 같은 과일은 크기에 따라 소량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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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가정의 설 차례상. [사진 한국국학진흥원·칠곡군]

일반 가정의 설 차례상. [사진 한국국학진흥원·칠곡군]

추석 차례상에 송편이 아닌 백설기를 올리는 이유는 명재 선생이 강조한 선비 정신 때문이다. 윤 씨는 "선비는 모름지기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는 말에 따라 건포도나 콩도 넣지 않은 하얀 백설기만 올린다”고 말했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검소하게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쓴 명재 선생은 "제사를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도 남겼다. 부녀자들의 수고가 크고 사치스러운 약과와, 기름을 쓰는 전은 올리지 말라는 말도 포함됐다. 이에 따라 명재고택에서는 기제사도 같은 크기의 상에 간소하게 차린다. 차례상에 나물 등 몇 가지 음식을 추가하는 정도다.

1454년 퇴계 이황 선생의 조부 노송정 이계양 선생이 세워 55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노송정 종택도 차례상을 간소하게 차린다. 진성 이씨 온혜파 18대 종부 최정숙씨는 "차례상에는 햇과일 5~7가지, 떡, 대구포나 명태포, 술이 올라간다”며 "전은 굽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음식의 양도 더 줄었다. 최씨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없으니 양을 줄이고 간소화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석담 이윤우 종가에서 불천위 제사에 나눠준 음복 도시락. [사진 한국국학진흥원·칠곡군]

석담 이윤우 종가에서 불천위 제사에 나눠준 음복 도시락. [사진 한국국학진흥원·칠곡군]

추석 때 차례를 지내지 않는 종가도 있다. 지난 설 차례상에 술, 떡국, 포, 전, 과일 한 쟁반 등 5가지 음식을 차린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종가 퇴계 종택은 추석 때는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대신 10월 셋째 주 일요일에 시제를 지낸다. 퇴계로부터 종손의 고위까지 모든 조상의 제사를 한 번에 지내는 것이다. 시제도 이전에는 음력 9월 9일에 지냈지만, 요일이 매번 바뀌고 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10월 셋째 주 일요일로 정했다. 시제 때 올리는 음식도 과일, 전, 떡, 포 정도다.

반면 일반 가정의 차례 음식은 기제사와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일반 가정의 차례 음식은 20여가지로 예서와 종가에 비해 평균 5~6배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명절 차례상 준비로 인해 갈등을 빚는 사례도 잦다. 하지만 유교의 올바른 가르침은 분수에 맞게 합당한 선에서 예를 표하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과도한 차례상 차림으로 가족 간 갈등이 생기고, 사회문제가 된다면 오히려 예를 잃는 셈이다. 김미영 위원은 "원래 유교에서의 ‘예’는 정성과 마음이 있으면 되는 것”이라며 "차례와 조상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사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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