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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새 정부가 리셋할 수 있게 한·일 관계 악화는 막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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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국과 일본 사이 ‘잃어버린 10년’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교부 차관·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교부 차관·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 위원

코로나19로 연기되고 개최마저 불투명했던 도쿄올림픽이 무관중과 무더위라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마무리됐다. 지나친 상업주의에 오염돼 무리하게 추진된 올림픽이라는 비판은 받아야겠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각국 선수들이 보여준 평화와 화합의 스포츠 정신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지친 인류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이웃 나라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스포츠 제전을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이 방일하여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함으로써 장기 복합다중골절 상태에 빠져있는 한·일 관계를 반전시킬 소중한 기회가 무산된 점은 매우 아쉽다. 이 상태가 내년까지 지속할 경우 한·일 관계는 전대미문의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하게 될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다가온 대선·총선으로 외교난제 풀어갈 여력 없는 두 나라
실용적 관점에서 정치력 발휘해 관계회복의 길 열어가야
불편한 과거사와 향후 협력 사안 분리하는 투 트랙 필요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외교적 해결에 힘써야

최근 일본과 한국을 차례로 방문한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도쿄에 있을 때는 방문이 성사된 것으로 알았는데 서울에 와보니 무산됐다고 언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양국 정부 간에는 방문 준비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20년 하반기 이래 한국 정부는 도쿄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악화한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지속적인 외교 노력을 기울여왔다. 바닥에 떨어진 한·일 관계를 회복 궤도에 올리겠다는 목적과 함께, 2018년 평창올림픽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시발점을 제공한 것처럼 도쿄올림픽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래 동면 상태인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시키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또 바이든 정부가 동아시아 정책 핵심축의 하나로 한·미·일 3각 협조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에 선제 대응하려는 의도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북한의 올림픽 불참 결정으로 이미 ‘평창의 재현’은 사라졌었지만, 나머지 두 가지 이유는 그대로 남아 있던 상태였다.

물거품이 된 도쿄올림픽 정상회담

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복합 대전환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외교 지렛대를 확충하고 한반도라는 프리즘으로 전략을 짜서 엇박자에 발이 꼬여버린 우리 외교의 유연성을 늘리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한·일 관계 정상화라는 점에서, 이번 대통령 방일은 꼭 이뤄졌어야 했다. 도쿄올림픽이라는 이웃 나라의 큰 행사를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방문 외교를 할 경우 통상의 정상외교 기획보다 훨씬 부담이 덜 하기 때문이다.

또 코로나19로 대면 정상 외교가 크게 위축되고 양국이 정치의 계절에 접어들기 때문에 현 정부 임기 내에 양국 정상의 상대국 방문 기회를 마련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한·일 관계의 특성상 정부 차원의 방향 설정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큼에 따라 정상 소통과 대화의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는 점에서도 한·일 관계의 국면 전환을 위한 호기를 놓친 것은 크게 안타까운 대목이다.

이번 우리 정부가 방문을 포기한 결정에는 주한 일본대사관 소마 히로히사 총괄공사의 부적절한 언행으로 인한 국내 여론의 악화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주된 원인은 공식 회담 개최와 일정한 회담 성과를 원한 한국의 입장과 강제징용 문제에 관한 해법 제시를 요구한 일본 입장이 충돌한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전략 목표를 추구하려 했다면 올림픽 개최를 축하하는 목적의 방문을 입구로 하여 분위기를 개선함으로써 정상회담에서 얻으려던 성과를 출구에서 얻는 접근이 보다 실효적이었을 것이다. 전략적 갈등 상태인 미국과 러시아 간에도 바이든 대통령이 전략 소통과 대중 견제라는 목표를 위해 제네바에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뺄셈의 관계에서 덧셈의 관계로

한·일 관계가 거의 10년에 이르는 장기간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악순환 구조에 함몰돼 있다. 양국이 서로 경원하는 현상에 빠졌고, 공유 가치·이익에 관한 냉정한 판단보다 감정이 앞서며, 동아시아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체 국면보다 양국 관계만을 보고, 현재와 미래보다 과거에만 시각이 고정된 이상 증세를 보인다. 양국 정부와 국민은 관계 악화로 생기는 눈에 보이는 손실뿐 아니라 관계가 좋았을 경우 얻게 될 이익을 잃는 데 따른 기회비용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아시아에서 2개국밖에 없는 OECD 회원국으로서 기본 가치를 공유하는 양국은 초불확실성과 전략적 유동성의 시대에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책임 있는 이해 당사국으로서 관계 회복을 서둘러야 한다. 하루빨리 양국 관계를 뺄셈의 관계에서 덧셈의 관계로 전환하여 북한의 핵무장과 불안정, 중국의 외교·안보적 공세, 미국의 신고립주의 성향으로 인해 흔들리는 동아시아의 자유주의적 지역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단기, 중·장기적 해법 동시에 추진

복합골절 상태인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만병통치약은 없고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협력은 늘리고 갈등은 줄임으로써 무너져버린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상대방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길을 착실히 걸어야 한다. 양국 사회에 반일·혐한 기류가 강하고 코로나19로 교류와 접촉이 제한돼 여건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과거사 해결 노력과 협력 사안 추진을 분리하는 투 트랙 접근을 하면서, 과거사 현안인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외교적 해결에 힘써 나가야 한다.

최근 한국 법원에서 양 사안에 관한 상충한 판결이 나오고 있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과거사의 연원인 일제 식민 지배의 법적 성격을 둘러싼 양국의 입장 차이를 외교적 타협으로 봉인한 1965년 한·일 관계 정상화의 조약 체제를 사법적으로 재단하는 데 따른 문제가 나타난 결과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사 해결을 이원적으로 접근하여 외교 현안으로서의 과거사 문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한 단기적 양방 해법을 꾀하고, 역사 화해와 과거사 문제의 핵심인 역사 연구·교육은 장기적 한방 해법을 추진함이 바람직하다.

한·일 양국은 올해 하반기 각각 대선과 자민당 총재 선거, 총선으로 정치의 계절에 진입하여 외교 난제를 풀 정치적 여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최선은 추가 악화를 막는 관리를 강화하고 내년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리셋을 모색할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바이든 정부도 막후에서 선의의 중재 역할을 꾀하고 있는 만큼 양국 지도자들이 실용적 관점에서 정치적 의지를 발휘하여 관계 회복의 길을 열어나가기를 기대한다.

일본 기업에 대한 압류재산 현금화부터 중지해야

한·일 관계가 더는 악화하지 않도록 막고 내년 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가장 시급한 일은 대법원 판결에 따른 일본 기업에 대한 압류 재산 현금화 중지다. 현금화는 일본의 보복과 한국의 반발이 교차하면서 양국 관계를 파국으로 이끌 우려가 크다. 8월 11일 대구지법이 일본제철의 즉시항고 3건을 기각하고 8월 18일 안양지원도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채권 압류·추심을 명령함으로써 관련 사법 절차가 거의 완료 단계인 만큼 현금화는 시간문제다.

정부로서는 무엇보다도 강제징용 문제의 외교적 해결 시간을 벌기 위해 현금화부터 막아야 한다. 원고·지원 단체를 포함한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등 제3자의 대위변제로 현금화를 중지시켜야 한다. 그리되면 강제징용 문제와 연계된 일본 통상 규제의 해제와 한일군사비밀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정상화도 동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한·일 갈등의 핵심인 강제징용 문제의 외교적 해법을 추구해야 한다. 외교적 해법은 한국 대법원 판결과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청구권협정을 절충하여 한국 정부, 청구권 자금 사용 한국 기업, 피고 일본 기업 3자가 출연하는 기금을 통해 원고들에게 배상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다. 2000년 독일의 기억·미래·책임 재단과 2000년 가지마건설, 2009년 니시마츠건설, 2016년 미쓰비시머티리얼 등 일본 기업의 중국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 설립의 선례가 있다. 기술적 사항은 이미 10여 개의 다양한 선택지가 제시된 만큼 상황과 교섭 추이에 따라 조합·변형하면 된다.

일본 정부도 일본 기업의 기금 출연과 원고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사과를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 수렴과 설득을 위해 한국 정부가 조정 역할을 맡아야 하며, 2005년 때와 같이 민관위원회에 위임하는 것도 방법이다. 외교적 타협을 토대로 국회의 특별 입법을 통해 대법원 판결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 2019년 화해치유재단 해산 이후 답보 상태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2015년 한·일 합의에 대한 보완 조치가 모색돼야 하며, 이 과정은 강제징용 문제 해결과 한·일 간 궁극적 역사 화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마음을 치유할 진정한 사과이므로 주한 일본 대사의 서한 전달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또 피해자 위령 시설 건립과 역사 연구 지원 등도 검토해야 한다.

드골과 아데나워가 프랑스·독일 역사 화해와 유럽의 통합을 위한 씨앗을 뿌렸듯이 한·일 양국에도 김대중과 오부치를 이을 새 리더십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담보할 건전하고 안정된 한·일 관계 구축을 위한 과감한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