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미현상(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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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하숙생이 청소 시비를 하다가 상대를 찔러 죽였다. 대학생들이 말이다. 19세의 국민학교 동기 동창생 사이에 왜 반말을 하느냐고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한쪽이 죽었다.
룸펜 아들이 아버지에게 용돈을 달랬다가 거절당하자 이번엔 불을 질렀다. 전세 보증금을 올려 달라는 주인집에 역시 불을 지른 40대의 남자도 있었다. 모두가 제정신들이 아니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세상을 「아노미 현상」으로 진단한다. 아노미(Anomy)는 그리스어 아노미아에서 비롯된 말이다. 신의 법을 무시하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케임은 그의 유명한 저서『자살론』에서 그 원인을 사회의 붕괴,인격의 파탄,탈도덕적 현상 등으로 설명했다.
어느 사회나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공동의 가치와 도덕적 기준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는 자연법,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률과 제도,그 사회가 전통적으로 존중해온 규준들이 그것이다.
바로 이런 가치들이 무너지고 만,바로 무규제(데레글르망)의 상태가 아노미라는 것이다. 왜 무너지는가.
뒤르케임은 대가족의 해체,촌락과 소도시의 해체,동업조합의 쇠퇴,종교적 통합의 이완 등을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흔히 전 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겪는 급격한 정치적,경제적 변동이 있을 때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명저 『고독한 군중』을 남긴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아노미를 사회적인 불안,고독감,그리고 귀속감이나 목적의 상실 등으로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원인의 분석만으로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우리는 끝도 없어 보이는 이 아노미를 하루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아노미를 없애지 못하면 아노미가 우리를 없애려 들 것이다.
그것은 역시 우리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의 도덕적인 결단과 리더십,그리고 그 집단이 높은 도덕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빛이 주위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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