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11회 삼성화재배 세계 바둑 오픈' 초읽기가 빚어낸 신기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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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11회 삼성화재배 세계 바둑 오픈'

<16강전 하이라이트>
○. 최철한 9단 ●. 구리 9단

죽느냐, 사느냐. 햄릿의 대사처럼 바둑도 노상 그것이 문제다. 그러나 다시 한발 더 나가면 바둑 역시 어떻게 죽느냐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고수들은 대개 '좋은 죽음'으로 판세를 구하고 하수들은 대개 '나쁜 삶'으로 판을 망친다. 누을 자리를 제대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장면1(152~163)=152로 잇자 구리(古力) 9단은 즉각 153으로 절단한다. 이로써 중앙 백대마의 퇴로가 끊겼다. 절체절명의 위기인데 초읽기마저 저승사자처럼 쫓아온다. 최철한 9단의 이마가 비통하게 일그러진다.

그는 뒤로 물러서야 할 시점에 어찌하여 백△(142)로 파고들었을까. 형세도 좋은데 백만대군 속을 필마단기로 돌입하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을까. 초읽기 탓이다. 초읽기 때문에 형세 판단이 틀렸고 그 바람에 강수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득 기적처럼 사는 길이 보였다.

하지만 163까지 백대마는 순식간에 차단됐다. 죽었다. 언뜻 보였던 사는 길은 순전히 신기루였다.

장면2(164~172)= 머리를 쥐어짜 내는 고심참담의 수순 끝에 최철한은 172까지 귀의 흑을 잡았다. 진즉 172의 곳을 두었으면 유리한 조건에서 바꿔칠 수 있었는데 결국 잔뜩 보태준 끝에 바꿔치기를 했다. 좋았던 형세는 이리하여 흑 우세로 역전되고 말았다.

중앙을 잡힌 것은 대략 40집. 귀는 몇 집일까. '참고도'처럼 흑이 1의 곳을 둔다고 가정하면 이 귀도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가 35집은 되니까 조금 위안은 된다. 바둑은 이리하여 흑이 1집 반 정도 우세한 가운데 끝내기로 접어들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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