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손배소·가압류 긴급대책, 冬鬪 달래기 약효 의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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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9일 정부의 특별담화는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분신으로 격앙돼 있는 노동계를 달래보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태의 빌미가 된 손배.가압류 문제의 해결을 정부 차원에서 먼저 약속함으로써 노동계의 투쟁 불씨를 조기 진화해보자는 것이다.

이는 노동계가 격한 동투(冬鬪)를 밀어붙일 경우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가 또다시 직격탄을 맞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손배.가압류 문제와 비정규직 보호에 대해서도 법 개정을 통해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도 '연내'라는 시한까지 못박았다.

또 담화문 발표 뒤 권기홍(權奇洪)노동부 장관은 최저 생계비나 최저임금을 보장해 주는 등의 예를 들기도 했다. 노동계에 대해선 정부가 막연히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체적인 대안마련에 착수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현재 노조나 노조원들에 대해 걸려 있는 손배.가압류는 46개 사업장에서 1천4백82억원에 달한다. 정상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액수다. 이때문에 노조의 반발만 더 격렬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파업→손배.가압류→노동자 분신.자살→반발파업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어보겠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기업의 정당한 권리와 어떻게 균형을 맞추느냐다. 경기가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노동계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또 다른 채권.채무 관계에서 벌어지는 손배.가압류와의 형평성도 제기될 수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정부가 노동계의 극단적 해결방식에 밀려 제도 개선을 추진하려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할 문제"라며 우려를 표했다.

당사자인 노동계도 정부의 담화에 냉담한 반응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자살.분신 사태를 추스르기에는 너무나 안이한 '공자 말씀' 수준이어서 더 큰 저항을 부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전체 사업장의 11%에 불과한 공공부문의 손배.가압류가 전체의 27%를 차지할 정도로 심한 데다 정부는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실태조차 모르고 있다"며 오히려 역공에 나섰다.

민주노총은 다음달 9일 전국노동자대회 때까지 정부가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 예정대로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재천명했다. 정부의 말은 못 믿겠으니 '물건'을 먼저 보자는 것이다.

한국노총도 "노동자들의 투쟁 자제를 요구하기에 앞서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용자의 노동탄압과 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위한 제도개선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노총은 다음달 23일 서울 여의도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열 예정이다.

결국 정부의 담화는 노사 양측으로부터 모두 외면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마련 중인 손배.가압류 대책이 노동계를 진정시키고 재계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부도 고민 중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權노동장관의 말도 그런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비춰진다.

김기찬 기자

<사진설명전문>
노조.경찰 충돌 29일 노동자 분신사건과 관련해 노동자대회를 연 민주노총 대구·경북 지부 소속 노조원들이 대구 성서공단 내 세원정공 정문 앞에서 경찰병력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대구=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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