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문화재 주인 아닌 보관자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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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 박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키로 한 조선시대 도검류. 16~18세기에 제작됐으며 국내에는 희귀한 문화재급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수십년간 '우리 문화'를 모으면서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저 보관자일 뿐이죠. 인생을 정리해야 할 나이니까 문화유산들을 차례차례 사회에 돌려줄 겁니다."

재미동포가 평생 모아 온 골동품, 고미술품 등 소중한 문화재 수백점을 고국에 기증하기로 했다. LA에 거주하는 체스터 장(한국명 장정기.67)박사가 주인공이다.

미 연방항공국 디렉터인 장 박사는 지난달 29일 방한해 경기여고 박물관에 조선시대 도자기, 자개장롱, 서화 등 20여 점을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선 중기 조총을 비롯한 각종 도검.병기류 40여 점을 기증하기로 했다. 삼성리움박물관에도 고려 충신 정몽주 초상화 등 수십 점의 문화재를 내놓을 계획이다.

그는 지금까지 40여 년간 1000여 점의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왔다. 이 중 500여 점은 이미 미국과 한국의 여러 박물관에 기증했고, 현재 500여 점이 남아있다고 한다. 신라시대 불상, 고려시대 불화에서부터 고려.조선시대 도자기와 도검류, 김홍도.허백련.이중섭의 그림 등이다. 중국, 인도, 중동, 티베트, 베트남과 중남미의 문화재도 모아왔다. 장 박사는 문화재에 심취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고미술품을 접하며 자랐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미국대사관으로 근무하러 떠나면서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려면 문화재를 가지고 얘기해야 한다"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수백점의 문화재를 갖고 출국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 박사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간 1958년부터 손수 문화재를 모았다.

48년 전 조종사 면허를 취득한 그는 60년대 중반부터 항공기 조종사로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여러 나라의 문화재들을 수집했다. 71년 대한항공이 미국에 첫 취항할 때 수석기장을 맡기도 했다. 71년부터는 뉴욕, 런던, 도쿄 등에 갈 때마다 틈만 나면 현지 미술품 경매장으로 달려갔다. 소장품이 너무 많아 오래전부터 자택 인근의 특수창고를 임대해 보관해왔다고 한다.

"조종사 연봉이 옛날엔 정말 대단했는데 절반쯤 고미술품 구입에 썼어요. 30여 년간 들인 돈이 수백만달러는 될겁니다. 소장품의 지금 가치요? 글쎄, 그걸 어떻게 계산하겠어요."

장 박사는 2002년 하와이대가 한국문화연구소를 개설할 때 우리 문화재 100여 점을 내놓으면서 기증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기증이 본격화한 것은 지난해 5월. 역시 조종사이면서 문화재 사랑이 각별했던 맏아들 진현(당시 26세)씨를 불의의 총격사고로 잃으면서 아들의 이름으로 LA미술관에 300여 점, 스미스소니언박물관 한국관에 30여 점을 기증했다.

그는 "적지 않은 한인들이 문화재는 고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편지를 해와 결심을 굳히게됐다"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성낙준 유물관리부장은 "연내에 장 박사의 미국 자택으로 실사를 나갈 예정인데 조선시대 도검류는 국내에 워낙 귀해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경기고를 졸업한 장 박사는 남가주대(USC)에서 학.석사를 마쳤고, 라번대에서 행정학 박사를 취득했다. 75년부터 연방항공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글=이재훈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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