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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만에 다시 가본 중국/「손문과 아시아」 학술회의 참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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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 배우기」에 열올린다/10대재벌 총수 전기 간행도/한국관광객 돈 마구뿌려 졸부 인상줄까 우려
「손문과 아시아」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8월2일∼7일)였던만큼 발표논문의 상당수가 손문의 이른바 「대아시아 주의」에 초점을 맞추었었다. 1924년 11월 손문은 일본의 신호에서 일본의 중국혁명 지원을 요청하는 호소의 일환으로서 「대아시아 주의」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1905년에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함으로써 아시아의 여러민족을 깨우쳤음을 강조하고 중국의 전통문화 바탕인 인의(왕도)에 바탕한 아시아 여러민족의 연합에 일본도 참여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손문의 이 「대아시아 주의」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많은 연구논문이 발표되어온 터로 그 목록을 만들어도 몇십페이지는 족히 될정도이지만 한국인 연구자로서 이 주제에 대해 논급한 것은 이번 학술회의에 제출된 나와 부산여대 배경한교수의 논문이 처음일 것이다.
우리들이 지적한 것은 「인의의 나라」 중국과 「강한 일본」의 결합이 손문의 「대아시아 주의」의 핵심구조인데 그 일본의 힘은 한국의 지배를 그 주된 근저로 하고 있으며 「인의로 결합된 아시아」라는 개념에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즉 손문의 아시아개념은 독립ㆍ자유의 한국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지않은 중국 이익중심적인 것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학문적으로 이점을 지적한 것은 우리가 처음일지 모르나 그 강연당시에 이미 한사람의 한국인 기자가 그같은 점을 손문에게 직접 따져본바가 있다. 강연을 현지에서 들은 동아일보기자 한사람이 『현재의 조선을 목전에 보면 귀하의 「대아시아 주의」는 서로 저촉되지 않느냐』고 질문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손문은 『물론 양립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에 있으면서 조선문제를 철저히 논함을 회피하고자 한다』고 대답했었다.
우리의 논문은 이를 손문의 둔사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우리의 주장에 대해 발표장에서도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정작 보다 본격적인 논변은 그날밤의 식탁에서였다. 손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비평에 대해 우리는 중국의 민족주의가 대내ㆍ대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양면성을 갖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중국의 자국이익중심의 민족주의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티베트인의 민족주의가 충돌하고 있지 않느냐고 응수했었다.
세계약소민족의 연합을 그토록 강조했던 손문이 그럴진대 일반 중국인의 자민족이익 중심태도는 더할 것임을 족히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중국인들이 오늘날 한국을 칭찬하기에 바쁘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값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북경의 사회과학원은 그 산하에 아­태 지역연구소를 새로 만들었는데 아시아의 네마리 작은 용의 경제발전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이번 회의를 배후에서 지휘했던 광동성 사회과학원의 장뢰원장도 광동성 사회과학원도 머지않아 아­태과학원을 발족시킬 것이라면서 그 준비책임자인 왕검이라는 젊은 연구자를 잘 부탁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소개했다. 왕검씨의 관심대상은 오로지 한국의 경제발전이었는데 한국의 경제발전을 연구하면 자국의 경제발전을 가능케하는 무슨 특효약같은 비결이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믿는듯 보였다.
중국의 여러 기업체 명칭을 보면 크고 작고간에 무슨무슨 집단이라는 식으로 이름붙인 것이 많은데 이것도 한국의 무슨무슨 그룹을 본뜬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길림대학 출판부에서는 사실 남조선 십대기업집단 경영비결이라는 시리즈 형식으로 한국의 10대재벌의 총수 전기 간행을 기획하고 있는데 삼성ㆍ대우ㆍ현대 것은 이미 간행되었다.
6ㆍ4 천안문사태의 배후 선동자로 지목되어 1년 이상 구속되었다가 최근에 풀려난 민주화추진파의 이론가 전 보건사회과학원장 이홍림같은 사람도 한국ㆍ대만의 민주화 시작은 자유경제를 바탕으로한 경제발전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민주화 가능성 근거도 한국ㆍ대만의 전례에서 찾으려한 바 있다.
영문으로 된 나의 논문제목은 「1920년대 한국인의 손문관」인데 회의준비위원회가 만든 팸플릿에 조선인의 손문관으로 중역되어 있었다.
내가 논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좌장을 맡은 대만 정치대학의 호춘혜교수가 한국인은 조선으로 불리는 것을 안좋아하니 이 제목은 「한국인의 손문관」으로 고쳐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을때 좌중의 중국인청중이 모두 당연한 듯한 표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기다가 최근 부쩍 늘어난 한국인 관광객의 부자행세는 또 어떠한가. 돈을 뿌리면서 상대방 중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은 없는 것일까. 북경 거리에는 한국기업의 광고가 홍수를 이루고 북경ㆍ광주비행장의 짐차에 한국의 대기업 「집단」 이름이 박혀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자. 부자나라 한국의 이미지가 형성되기전에 그들의 한국이미지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독재의 나라,「미국의 식민지」,또는 「미국의 피점령지」였고,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를 빼앗긴 「소고려」의 망국노,중국의 문화를 모방한 속국 등이 그 주된 것들이었다.
망국노ㆍ속국민ㆍ식민지 피지배인의 이미지에서 부자나라사람,더 적절히(?) 표현한다면 졸부의 나라사람으로 단숨에 비약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고 학문이 있고 자기나라 중국의 역사까지도 심도있게 연구하는 학자도 있음을 알리지 않은채 졸부인상만 자꾸 확대해 나간다면 앞날의 중국과의 교류­그 교류를 경제교류에 한정한다해도­는 알맹이 있는 착실한 것이 되기 어렵지 않을까.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펴낸 전7권의 『강좌중국사』를 받아 본 한글을 쓸줄 아는 한 중국인 학자는 나에게 보내온 한글편지에서 「중국사람으로서 외국(한국) 학자가 중국사를 연구해 짓는 책들을 받고 반가워하면서도 감개깊었습니다」라고 해왔다. 미숙한 표현이지만 그 안에서 굴절된 한국과의 편모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손문같은 혁명가도 굴절된 한국관을 가졌었음을 다시한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시점에 우리는 와 있는것 같다.<민두기교수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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