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점에서 '열혈남아'(7일 개봉)는 맛이 다른 조폭영화다. 주인공은 조직 안에서 모난 돌 대접을 받던 건달 재문(설경구). 신참인 치국(조한선)을 데리고 오래 벼르던 복수를 하러 다른 건달의 고향으로 내려가는데, 여기서 만난 국밥집 주인 아줌마 점심(나문희)에게 흡사 모자(母子)같은 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아줌마, 다름아니라 재문이 죽이려는 건달 대식(윤제문)의 엄마다.
주먹세계에 대한 판타지보다 비루한 일상의 사실적 묘사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에서 빛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느물거리는 건달 설경구와 호흡을 맞춰 괄괄한 듯하면서도 결이 고운 모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나문희(65)를 만났다. 스크린 데뷔는 '조용한 가족'(1998년)이후 8년이지만, '주먹이 운다''너는 내 운명'를 거쳐 그녀는 지금 충무로가 가장 기대고 싶은 '엄마'로 떠올랐다. 드라마에서 쌓아올린 오랜 내공도 내공이지만, "이번에도 참 많이 배웠다"는 마음가짐은 8년차의 젊은 배우 같았다.
-최근 부산영화제 무대인사에서 자청해 춤과 노래를 선보인 게 큰 화제가 됐더군요. 그런 공개무대가 낯설지 않던가요.
"땡볕에 기다려준 젊은 관객들의 모습을 보니까 뭔가 호응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예전에 연극을 해서 그런지, 관객들 박수를 받으면 힘이 나요. 지난해 대종상 여우조연상('너는 내 운명')을 받은 것도 그런 박수 같았고."
-어머니 역은 숱하게 해왔지만, 이번에는 참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비극적인 상황의 어머니라는 점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시나리오를 받고 고민이 컸어요. 이 그릇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다른 배우들을 추천하면서 안 하겠다고 했어요. 큰 역할이라 욕심은 났지만. 우리 딸들한테도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묻고 그랬죠. 오죽하면 이 영화 하고 나면 죽어도 좋다고 했으니까요."
-성우로 시작해 드라마는 초창기부터 어머니 역을 하셨죠. 나중에야 처녀 역을 한 게 화제가 되기도 했을 정도로요.
"내가 이대근씨랑 동갑인데, 그 어머니 역을 하라고 해서 했지요. 몸집이 크니까 처음부터 엄마, 마담 이런 역할을 많이 맡겼어요. 1m65㎝가 지금은 큰 키가 아니지만 예전에는 남자배우들도 아담한 분이 많았어요. 정말 나한테 꼭 맞는 역은 노희경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96년.치매 시어머니를 돌보며 자식들을 길러낸 주인공이 암 선고를 받는 이야기)에서 비로소 만났어요. '나'를 찾은 거죠. 남들은 어렵지 않았느냐고들 하는데, 이모저모 내가 지니고 있던 걸 담아내는 게 너무너무 쉬웠어요. 이번 영화를 그 2탄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어떻게들 보실지 모르겠네."
-연기파로 불리는 남자배우들과 연달아 호흡을 맞췄는데요.
"설경구씨는, 이런 배우가 있다는 게 참 자랑스러워요. 나는 그냥 연기로 하면 되지, 싶은데 그걸 몸으로까지 다 해요. 삭제된 장면 중에 내가 모질게 때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자기 몸을 들이대더라고요. 요즘 촬영하는 '그 놈 목소리'도 초상집 장면 찍는다고 전날 밤을 새우고 쾡한 눈으로 촬영장에 가요. 황정민씨는 늦게 출세한 편이잖아요. 그 전에 훈련이 대단했나 봐요. 고지식할 정도로 열심이에요. '너는 내 운명'에서 전도연씨가 떠난 이후 장면을 찍는데 열흘 만에 체중감량을 하더라고요. 말 그대로 몸바쳐서 하는 배우들이에요."
-세 딸의 어머니인데, 연기로나 생활로나 여자와 어머니는 어떻게 다른가요.
"참는 힘의 차이인 것 같아요. 참고, 마무리를 다하는 게 어머니예요. 마무리란 게 참 귀찮은 일인데, 그걸 하게 돼요."
-이 영화에서도 어머니인 점심의 마지막 대사가 아릿한 여운을 줍니다.
"한 사흘을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가 이 영화의 주제곡)를 틀어놓고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준비했어요. 감독에게 그랬죠. 첫 방에 되게 하라, 안 그러면 나는 두번 다시 그게 안 나올 것 같다. 그래서 정말 처음 촬영한 분량에서 오케이가 났어요. 그 장면하고, 국밥집에서 기르던 개가 잡아먹히게 돼서 마지막 밥 주는 장면, 그런 정도가 그래도 좀 제대로 한 것 같아요."
-리허설을 많이 할수록 연기의 맛이 안 난다는 점이 설경구씨랑 비슷하네요.
"그래요. 나는 후배들이 너무 많이 준비해서 나오지 않았으면 해요. 그게 쉽지는 않죠. 나도 조바심이 많은 성격이에요. 무대인사 한 번 하려면, 화장실을 세 번쯤 갔다 와요. 근데 연기는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안 되니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쟁이, 나이 든 쟁이요. 그림쟁이든, 노래쟁이든. 근데 힘이 딸려서 할 수 있을래나 몰라."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