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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열혈남아'서 정 듬뿍한 엄마 역할 나문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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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폭영화의 정서라면 대개 의리와 배신이 주조를 이루게 마련이다. 하지만 강한 척하는 남자들일수록 약한 고리가 있으니, 바로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다.

이런 점에서 '열혈남아'(7일 개봉)는 맛이 다른 조폭영화다. 주인공은 조직 안에서 모난 돌 대접을 받던 건달 재문(설경구). 신참인 치국(조한선)을 데리고 오래 벼르던 복수를 하러 다른 건달의 고향으로 내려가는데, 여기서 만난 국밥집 주인 아줌마 점심(나문희)에게 흡사 모자(母子)같은 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아줌마, 다름아니라 재문이 죽이려는 건달 대식(윤제문)의 엄마다.

주먹세계에 대한 판타지보다 비루한 일상의 사실적 묘사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에서 빛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느물거리는 건달 설경구와 호흡을 맞춰 괄괄한 듯하면서도 결이 고운 모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나문희(65)를 만났다. 스크린 데뷔는 '조용한 가족'(1998년)이후 8년이지만, '주먹이 운다''너는 내 운명'를 거쳐 그녀는 지금 충무로가 가장 기대고 싶은 '엄마'로 떠올랐다. 드라마에서 쌓아올린 오랜 내공도 내공이지만, "이번에도 참 많이 배웠다"는 마음가짐은 8년차의 젊은 배우 같았다.

-최근 부산영화제 무대인사에서 자청해 춤과 노래를 선보인 게 큰 화제가 됐더군요. 그런 공개무대가 낯설지 않던가요.

"땡볕에 기다려준 젊은 관객들의 모습을 보니까 뭔가 호응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예전에 연극을 해서 그런지, 관객들 박수를 받으면 힘이 나요. 지난해 대종상 여우조연상('너는 내 운명')을 받은 것도 그런 박수 같았고."

-어머니 역은 숱하게 해왔지만, 이번에는 참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비극적인 상황의 어머니라는 점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시나리오를 받고 고민이 컸어요. 이 그릇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다른 배우들을 추천하면서 안 하겠다고 했어요. 큰 역할이라 욕심은 났지만. 우리 딸들한테도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묻고 그랬죠. 오죽하면 이 영화 하고 나면 죽어도 좋다고 했으니까요."

-성우로 시작해 드라마는 초창기부터 어머니 역을 하셨죠. 나중에야 처녀 역을 한 게 화제가 되기도 했을 정도로요.

"내가 이대근씨랑 동갑인데, 그 어머니 역을 하라고 해서 했지요. 몸집이 크니까 처음부터 엄마, 마담 이런 역할을 많이 맡겼어요. 1m65㎝가 지금은 큰 키가 아니지만 예전에는 남자배우들도 아담한 분이 많았어요. 정말 나한테 꼭 맞는 역은 노희경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96년.치매 시어머니를 돌보며 자식들을 길러낸 주인공이 암 선고를 받는 이야기)에서 비로소 만났어요. '나'를 찾은 거죠. 남들은 어렵지 않았느냐고들 하는데, 이모저모 내가 지니고 있던 걸 담아내는 게 너무너무 쉬웠어요. 이번 영화를 그 2탄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어떻게들 보실지 모르겠네."

-연기파로 불리는 남자배우들과 연달아 호흡을 맞췄는데요.

"설경구씨는, 이런 배우가 있다는 게 참 자랑스러워요. 나는 그냥 연기로 하면 되지, 싶은데 그걸 몸으로까지 다 해요. 삭제된 장면 중에 내가 모질게 때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자기 몸을 들이대더라고요. 요즘 촬영하는 '그 놈 목소리'도 초상집 장면 찍는다고 전날 밤을 새우고 쾡한 눈으로 촬영장에 가요. 황정민씨는 늦게 출세한 편이잖아요. 그 전에 훈련이 대단했나 봐요. 고지식할 정도로 열심이에요. '너는 내 운명'에서 전도연씨가 떠난 이후 장면을 찍는데 열흘 만에 체중감량을 하더라고요. 말 그대로 몸바쳐서 하는 배우들이에요."

-세 딸의 어머니인데, 연기로나 생활로나 여자와 어머니는 어떻게 다른가요.

"참는 힘의 차이인 것 같아요. 참고, 마무리를 다하는 게 어머니예요. 마무리란 게 참 귀찮은 일인데, 그걸 하게 돼요."

-이 영화에서도 어머니인 점심의 마지막 대사가 아릿한 여운을 줍니다.

"한 사흘을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가 이 영화의 주제곡)를 틀어놓고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준비했어요. 감독에게 그랬죠. 첫 방에 되게 하라, 안 그러면 나는 두번 다시 그게 안 나올 것 같다. 그래서 정말 처음 촬영한 분량에서 오케이가 났어요. 그 장면하고, 국밥집에서 기르던 개가 잡아먹히게 돼서 마지막 밥 주는 장면, 그런 정도가 그래도 좀 제대로 한 것 같아요."

-리허설을 많이 할수록 연기의 맛이 안 난다는 점이 설경구씨랑 비슷하네요.

"그래요. 나는 후배들이 너무 많이 준비해서 나오지 않았으면 해요. 그게 쉽지는 않죠. 나도 조바심이 많은 성격이에요. 무대인사 한 번 하려면, 화장실을 세 번쯤 갔다 와요. 근데 연기는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안 되니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쟁이, 나이 든 쟁이요. 그림쟁이든, 노래쟁이든. 근데 힘이 딸려서 할 수 있을래나 몰라."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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