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촉감(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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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9월은 가을의 문턱. 문득 릴케의 시 한구절이 생각나는 계절이 되었다.
『주여 어느덧 가을이 왔습니다/지나간 여름은 위대하였습니다/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눕히고/광야로 바람을 보내 주시옵소서/… 그리고 밤중에 눈을 뜨고 책을 읽으며/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나뭇잎이 떨어질때 불안스러이/가로수가 나란히 서있는 길을 혼자 거닐 것입니다.』
릴케은 지나간 여름을 위대했다고 읊었다. 따뜻한 햇빛으로 1년의 양식을 익혀주고 향긋한 포도주의 맛을 내게 하는 포도송이를 영글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여름은 너무나 무덥고 지겨운 계절이었다. 그것은 30도를 훨씬 웃돌며 연일 계속된 푹푹 찌는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정치는 정치대로 겉돌기만 하며 국민에게 짜증만 안겨주었고,경제는 경제대로 물가다,증권이다 하여 사람들의 주름살만 깊게 했다.
어디 그 뿐인가. 하루가 멀다하고 대서특필되는 살인과 폭력,거리마다 골목마다 쌓이는 쓰레기더미,상수원을 오염시키는 각종 산업폐기물들은 우리의 지난 여름을 더욱 무덥고 지겹게 했다.
그러나 이제 9월이 왔다. 태풍 에이브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와닿는 것이 가을의 촉감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4계는 저마다 운치와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가을의 운치는 유별난 데가 있다.
하늘이 높고 오곡이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라 해서만은 아니다. 춥고 긴 겨울 다음에 오는 봄이 더욱 반갑듯이 무덥고 지겨운 여름의 뒤에 오는 가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태우고 난 뒤의 정적같은 가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명상을 일깨워준다.
가을은 정신없이 뛴 지난 발자취를 새삼 더듬어 보는 계절이면서 또한 미구에 닥칠 조락을 예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가을에 우리가 곰곰 생각해봐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정치도 이대로는 안되고 경제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저마다 신경질적으로 외쳐대던 집단이기주의도 제발 이 가을에는 소리를 낮추자. 그래서 알찬 결실의 가을을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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