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한 「인면수심」(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제발 제몸만은…. 저는 임신 4개월째입니다.』
한 여자승객의 울부짖는 듯한 애원은 인면수심으로 돌변한 택시운전사의 파렴치한 욕망앞에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이모씨(28ㆍ은행원)가 요금시비끝에 납치돼 성폭행까지 당한 것은 일과를 마친뒤 가벼운 발걸음에 약혼자를 만나러가던 24일 오후5시30분쯤.
서울 을지로1가 두산빌딩 앞에서 포니택시 앞좌석에 탄 이씨는 이태원 해밀턴호텔 부근에 도착,미터기에 찍힌 요금을 보았다. 「1천7백50원.」
거스름돈을 받을 생각없이 2천원을 지불했다. 『차가 밀려 시간이 더 걸렸으니 1천원을 더 내라』는 택시기사 한철구씨(32ㆍ서울 월계동)의 퉁명스런 대꾸에 이씨의 단호한 거절은 당연한 일.
『내라면 내지 웬말이 많아!』 순간 욕설과 함께 한씨는 이씨를 그대로 태운채 택시를 과속으로 몰아 어둡고 인적이 드문 양재동 화물트럭터미널부근 야산앞에 멈춰섰다.
하도 얼떨결에 일이라 소리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겁에 질려있는 이씨를 한씨는 뒷좌석으로 끌고가 위협했다.
『나는 갈데까지 간 사람이야. 소리치면 죽여.』
『임신중이니 제발 폭행만은 말아달라』고 매달리는 이씨를 끝내 폭행한 한씨는 이씨의 손가방에 든 현금 12만원까지 빼앗은뒤 다시 앞좌석에 태웠다.
『만일 신고하면 너의 남자에게 알리겠어.』
온갖 위협을 하며 시내를 돌아다니던 한씨는 오후10시45분쯤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에 이씨를 내팽개치듯 버리고 달아났다.
『날씨도 덥고 일당도 안챙겨지고 해서 홧김에….』
이씨의 신고로 쇠고랑을 찬 한씨는 무더위에 의한 짜증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서 태연히 진술했다.
충동적 욕망에 의해 한 여인의 순결을 짓밟아 버리고도 이를 『홧김에…』라는 이유로 단순화시켜 버린 한씨의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모두의 진정한 인간성 회복이 시급함을 절감해야 한다.<최훈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