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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인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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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의 사춘기 시절인 1960년대는 일본 각 가정에 전축과 피아노가 보급되기 시작한 때였다. 우리집도 아버지 사업이 잘되면서 전축을 구입했고, 여동생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드웨어는 갖춰졌지만 음악을 즐기는 감성이나 지식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전축은 있어도 음반이 없었고, 어떤 음반을 사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내 머릿속에는 클래식 음악은 특권계층의 사치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내가 재일 조선인이라는, 일본 사회의 저변계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는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우상파괴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1 때 같은 반 여학생으로부터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의 연주 음반을 생일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답례로 이노우에 미쓰하루(井上光晴)라는 소설가가 쓴 '계급'이라는 책을 주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나가사키 탄광촌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일본 특권층에 대한 반발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단순하지 않았다. 특권계층에 강렬하게 반발하면서도, 그 여학생이 건넨 한 장의 레코드에 빠져들었다. 내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동경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지금도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나는 클래식 음악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한국에 와서 가장 기뻤던 것 중의 하나가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을 틀어 주는 라디오 방송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는 그런 고마운 방송이 없다. 서울 예술의전당에 처음 갔을 때는 깜짝 놀랐다. 나는 종종 일본과 유럽의 공연장에 가는데, 이만큼 훌륭한 음악당은 그리 흔치 않다. 이곳에서 공연하는 연주자들의 기량도 뛰어나다. 서울시향 연주를 두 번 들었는데, 실력은 틀림없이 일류다. 특히 플루트와 오보에 등 목관악기들은 세상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관객들의 매너는 아직 미숙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주 시작 직전의 팽팽한 침묵이나, 곡 맨 마지막 음에서 이어지는 긴 여운은 연주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예술의 구성 요소다. 특히 리스트와 슈만 같은 우울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곡들에선 더욱 그러하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열광적인 박수와 환성을 보내거나, 몇 번이나 앙코르를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음악 감상을 방해할 때가 있다. 관객도 좋은 연주를 완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고, 예술 창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관객의 미숙함에 때때로 연주자들이 영합한다는 점이다. 눈 앞의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은 연주자의 의무이지만 연주자의 마음은 보다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향해 있어야 한다. 고독하고 고립되더라도 높은 꿈을 간직해야 한다. 그 긴장감이 관객에게 단순한 친근함과 즐거움을 넘어선 진정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동규 콘서트에서 돌아오는 도중 아내가 "악기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인데… 아깝네요"라며 중얼거렸다. 나도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현대법학<원문 일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