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민생 역주행' 심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노무현 정부의 정책과 국민의 선택이 정반대로 엇갈리는 '민심과 정책의 역주행 현상'이 심각하다. 서울 강남의 집값 상승을 막겠다고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자 오히려 강남 집값이 뛰고 있다. 정부가 "투기를 하면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공언했지만 신도시 발표 지역은 투기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교육부는 "앞으로 외국어고에 지원하면 절대로 불리하다"고 밝혔지만 올해 외고에 대한 지원은 더 높아졌다. 정부가 뭐라고 하든 믿지 않는 '청개구리 심리'가 퍼져가고 있다. 이에 대해선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주의적 탁상행정이 이어지면서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붕괴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집값 잡겠다" → 공급 외면하다 집값만 올라

26일 건설교통부 직원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23일 추병직 건교부 장관이 관련 부처와의 협의가 끝나지 않은 신도시 건설 계획을 발표한 후유증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인근 지역 투기 바람 등 부작용을 불러온 데 대해 책임론을 거론하며 추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동안 추 장관의 강력한 우군이었던 청와대마저 "신도시 계획 발표의 시점과 과정 등에 문제가 없었는지를 점검하고 있다"고 밝혔다.

추 장관이 갑자기 신도시 건설 계획을 털어놓은 것은 최근 집값 상승세를 가라앉히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치밀하게 계산하지 못한 이번 발표는 주택시장에 큰 혼란만 불러왔다. 정부가 27일 신도시 예정지로 발표할 예정인 인천 검단 지역과 그 주변은 투기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또 검단 지역이 서울 강남이나 분당의 대체지로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서울 강남권의 집값까지 오르고 있다. 사실 추 장관은 그동안 부동산 시장보다 청와대와의 코드 맞추기에 열중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다 보니 추 장관의 발언이 오락가락하고, 이에 따라 부동산 정책도 흔들리곤 했다.

지난해 6월 10일 추 장관이 "판교와 같이 주거환경이 좋은 신도시를 계속 건설하겠다"고 말했다가 나흘 뒤 "신도시 건설 계획을 검토한 적이 없다"고 발뺌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청와대와 여당이 신도시 건설과 같은 공급 확대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곧바로 정책 방향을 바꿔버린 것이다.

추 장관은 지난해 발표된 8.31 정책에 '2010년까지 주택 용지를 1500만 평 확보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을 제시하면서 "수없이 주택 공급을 늘리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는데 언론과 정치인들이 이를 무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8.31 대책 발표 후 1년이 넘도록 이렇다 할 공급 확대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세제 강화 등 주택 수요를 억제하는 쪽에만 집중했다. 분양 원가 공개 문제도 마찬가지다. 시민단체 등의 원가 공개 요구에 대해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추 장관은 대통령의 공개 방침 발표 이후 "원가 공개를 반대한 적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지금 집을 사 봐야 비싼 가격에 사는 것"이라는 추 장관의 23일 발언도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이날 박병원 재정경제부 차관은 "몇 달 안은 못 내다보지만 공급 확대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면 집값이 몇 년 내 안정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꼬리를 내렸다. 다른 당국자들은 집값 안정에 대한 자신감의 수위를 낮추는 모습인데 추 장관만 먹혀들지도 않는 '쇠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것이다.

김준현 기자

"외고생 불리해진다" → 외고 경쟁률 더 높아져

김진표 전 부총리는 지난 6월 "외국어고등학교는 실패한 정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준화 지역에서 1등급을 받을 학생이 외고에선 3~4등급을 받기도 힘들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며 "앞으로는 외고생이 절대 불리해진다"고 말했다. 이 같은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인지 교육부는 외고에 대해 갖가지 불이익을 줬다. 외고의 모집단위를 전국이 아닌 광역으로 제한하고 외고 설립 전 교육부와 사전 협의토록 하는 등 규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26일 원서 접수를 마감한 서울 지역 외고의 일반전형 경쟁률은 4.67대 1을 기록했다. 지난해 수준(4.43대 1)을 넘어섰다. 27일 마감하는 경기 지역의 이날 경쟁률은 6.72대 1이다. 지난해 기록인 3.88대 1의 거의 두 배가 됐다.

외고 열기는 9일 전 끝난 특별전형 때도 감지됐었다. 당시 경쟁률이 8.55대 1(서울)과 6.22대 1(경기)이었다.

학부모와 학생들의 선택은 교육부의 정책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 정모(41.서울 서초동)씨는 "교육부가 뭐라고 하든 우리 아이는 소신껏 지원했다"며 "경쟁력 있는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면 장래 진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를 조금 하는 아이들은 모두 외고에 진학하려는 분위기"라며 "불이익을 받는다고 하지만 교육부의 정책은 수시로 왔다갔다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서울대 교육학과 백순근 교수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선 뛰어난 역량을 갖추는 게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란 인식이 있다"며 "외고 등 특목고가 그런 능력을 길러주는 곳이란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늘교육 임성호 실장은 "외고 출신 10명 중 8명은 톱5 대학에 간다는 데이터가 있다"며 "내신에선 불리하지만 수능에선 유리하고 논.구술에서도 불리할 게 없다는 게 학부모와 학생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교육 분야에서 정부 목표가 수요자격인 학부모.학생의 요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한 것은 이번뿐이 아니다. 정부는 국제중학교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가평 청심국제중의 2007학년도 일반전형 경쟁률은 지난해(21대 1)의 2.5배 수준인 52.2대 1을 기록했다.

정부는 2008학년도 입시안을 마련하면서 수능을 약화시키고 학생부를 강화했다. 사교육비를 경감하고 공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다. 그러나 대학의 논술 강화 움직임과 맞물리면서 사교육 시장 폭발 사태를 불러왔다.

고정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