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깰 힘조차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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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 김근태 의장은 또다시 참패로 드러난 재.보선 결과에 대해 "국민의 심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이 말마저 국민에게 상투적으로 들리게 된 상황이 아프다"고 했다.

◆ "공허한 평화수호세력론"=지도부는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김 의장은 "열린우리당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평화수호세력 대결집을 추진하겠다"며 정계 개편 의사를 공식화했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열린우리당에 정계 개편은 정말 희망일 수 있을까.

현재로선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당내 상황이 말이 아니다. 비공개로 열린 비대위 회의에선 '사공이 많은 배'처럼 불협화음이 터졌다.

"재창당을 추진하겠다"는 전날 이목희 전략기획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이석현 의원은 "그게 무슨 뜻이냐. 비대위에서 충분한 토의도 없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되느냐"고 비판했다.

김부겸 의원은 김 의장이 "선거 결과는 국민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을 포함해 어느 정당에도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 무늬만 바꾸는 재창당이냐=비대위원 다수는 김 의장의 지도부가 '무늬만 바꾸는 재창당'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이 중 일부는 "당이 사망선고를 받았는데 이번에도 유야무야 할 수는 없다"며 비대위원직 사퇴를 포함한 중대 결심 가능성을 내비쳤다.

당내 여러 모임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문희상.유인태 의원 주도의 '광장 모임'은 이날 밤 긴급 회합을 했다. 한 참석자는 "지금은 국감이 진행 중인 만큼 당의 진로 논의는 자제할 필요가 있다"며 "당의 단합과 결속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초선 의원들의 모임인 '처음처럼'은 내년 2월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당겨서 하자고 제안했다. "구심력 있는 새 지도부가 하루 빨리 구성돼 전권을 가지고 폭넓은 연대 구축에 나서야 한다"(민병두 의원)는 취지다.

<예상 시나리오 표 참조>

그러나 전병헌 의원은 "조기 전당대회를 하면 열린우리당의 외피가 두꺼워져 국민이 바라는 새로운 모습이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당내 의견이 쉽사리 모이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 가지다.

◆ "호남과 연대는 혼란 자초"=무엇을 하든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만한 길이 뚜렷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지역의 한 의원은 "평화세력 결집이든 뭐든 어떤 정계 개편 시나리오도 국민에겐 공허하게 들릴 뿐"이라며 "무슨 힘으로 우리당이 개편을 추진하겠으며, 설사 추진한들 국민이 바라는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치 분석가들의 평가는 더욱 냉정하다. 정치 컨설턴트인 김윤재 미국 변호사는 "열린우리당은 정계 개편을 주도할 동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의원 개개인은 '이대로는 안 된다'며 불안해하지만, 당내 리더들이 비전을 제시하지 못 하는 상황에서 당을 깨뜨릴 만한 중심세력도 없어 식물인간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장은 "평화세력연대 같은 통합 노력은 별 의미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당 분열의 모멘텀(추진 동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김 소장은 "열린우리당의 실패는 스스로 정책과 노선을 제시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며 "호남 세력을 묶기 위한 물리적 연대는 노선의 혼란을 부추길 것이기에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덕영 코리아리서치 대표는 "열린우리당 스스로 변화하거나 잘해서 반전을 만들기엔 여론 지지도나 당을 둘러싼 상황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욱.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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