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경제 빛과 그림자] 下. 빈부差·지방경제 악화에 골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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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쌀쌀한 초겨울 비가 스산하게 흩날리는 지난 19일 오후. 모스크바 남서쪽 우니베르시체트 지하철역 앞에서 허름한 겨울용 솜외투로 무장한 주름투성이의 할머니가 연신 땅바닥을 눈으로 훑고 있다. 노파가 갑자기 달려가 집어 든 것은 버려진 맥주병. 폐품으로 팔기 위해 빈병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지나이다란 이름의 이 노파가 빈병을 팔아 하루에 버는 돈은 기껏해야 2달러(약 2천4백원) 정도. 한달 내내 길거리를 헤매도 50~60달러 벌이가 고작이다. 호황을 누리는 모스크바의 화려한 풍경에 가린 뒷모습이다.

◇빈부 격차와 수도권 집중=모스크바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도시다. 인구의 1% 정도인 9만~11만명의 고소득층이 수천달러짜리 외투를 입고 벤츠를 몰며 일식집에서 외식을 즐기는 한편에는 삶은 감자와 양배추만으로 한끼를 때우는 빈곤층도 적지 않다. 모스크바시 부시장 류드밀라 슈베초바는 "시 전체 인구의 22% 정도가 최저생계비인 월 1백5달러도 벌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도와 지방 간 경제 수준 차이도 문제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섬'이라고 할 정도로 대부분 자본이 수도에 집중돼 있고 생산.유통 등 경제활동도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모스크바를 거쳐 지방도시를 방문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도시와 시골'의 차이를 느낀다고 말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열악했던 지방 경제 사정이 더욱 악화됐다. 부의 재분배와 지방 경제 육성은 러시아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다.

◇러시아 디스카운트=개도국일수록 경제에 대한 정치의 입김이 강하게 마련인데,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27일 러시아 RTS 종합주가지수는 12.9% 폭락하고 한시간 동안 거래가 중단됐다. 1999년 5월 이래 최대 하락폭이다. 지난 주말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사장이 구속되면서 투자자들이 앞다퉈 팔자에 나선 것이다. 러시아 증시 전체 시가총액의 30%를 차지하는 유코스 주가도 15.4% 폭락했다.

유코스는 러시아 기업 중 처음으로 서구식 회계 제도를 도입하는 등 투명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최고경영자의 야당 성향 때문에 푸틴 대통령의 철퇴를 맞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기는 정치가 뛰어가는 경제의 뒷다리를 잡은 셈이다.

유코스 사태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할 것이란 우려가 있지만 단기적 충격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찮다. 이미 개도국임을 감안해 이에 걸맞은 위험을 감수하고 러시아에 투자한 이들이 많다는 분석이다.

◇불안정한 경제구조=오일달러가 러시아 경제를 부흥시키는 효자노릇을 하고 있지만 경제구조가 지나치게 에너지 자원 의존적인 것은 문제다. 세계은행(IBRD) 러시아 지점은 지난 8월 "러시아 경제가 올 상반기에 예상 외의 높은 성장을 이룩했지만 이는 국제유가 강세 덕을 본 측면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경제의 에너지 자원 의존도는 최근 몇 년 새 계속 늘어나 현재 석유.가스 판매 수입은 국내총생산(GDP)의 20%, 전체 수출액의 50~60%, 재정수입의 3분의 1에 달한다. 앞으로 유가가 하락할 경우 경제가 다시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취약한 금융시스템=은행 시스템의 취약성도 러시아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다. 은행 규모가 영세한 데다 독과점 현상까지 심해 시장경제 제도를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이 가계와 기업 사이에서 저축과 투자를 매개하는 본연의 역할을 하기보다 일부 기업의 사(私)금고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다.

중앙은행 추정에 따르면 일반인들이 장롱 속에 묻어둔 돈은 3백70억달러에 달한다. 은행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수출대금의 상당액을 해외 외국은행에 예치해 두고 있다. 이밖에 복잡하고 부패한 관료제도 개선과 엄격한 국가통제하에 있는 에너지산업 분야 개혁, 특히 전기.가스 가격 자율화 등이 당면 과제로 꼽힌다.

권구훈 국제통화기금(IMF) 모스크바 대표부 부소장은 "오일달러가 넘치는 지금이야말로 러시아 경제가 건실한 경제구조를 갖춰 장기적 성장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적기"라고 충고했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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