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조백일장10월] "운율 장단 맞추는 재미에 나이 잊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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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전화 목소리로는 좀체 짐작할 수 없었다. 장원 작품에서 기풍 있는 면모를 짐작하긴 했지만 실제 나이가 칠순이 넘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10월 중앙 시조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한 이광수(사진)씨는 1935년 출생이다. 우리 나이로 일흔 두 살인 셈이다. 젊게 사시는 군요, 운을 뗐더니 이씨는 "열심히 바쁘게 살다 보니 나이 먹는 줄도 모른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씨는 부산대 명예교수다. 2000년까지 32년간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를 테면 문학과는 담을 싼, 논리와 이론으로 평생을 산 사회과학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칠순을 넘긴 지금, 어쩌다 문학에 눈을 뜨게 됐을까.

"중학교 다닐 때 이항녕(90.전 홍익대 총장) 교장 선생님이 문학 공부를 무척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러 허난설헌의 '시문집'을 찾아 읽곤 했지요. 그 씨앗이 오랜 눈비에도 썩지 않고 숨죽이고 있었나 봅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립고 사무치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씨는 이미 시인이다. 부산에서 발간되는 '실상문학'이란 잡지를 통해 2002년 등단한 자유시인이다. 아직 시집은 펴내지 않았지만, 부산대 평생교육원에서 20여 명을 대상으로 시와 시조 창작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굳이 시조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물었다.

"자유분방하게 산문시를 쓰는 즐거움도 있지만 운율의 울림에 장단을 맞추는 재미가 시조에게 있습니다. 시집이 나와도 시조시집이 먼저 나올 것 같습니다. 허허허…."

웃음소리는 여전히 힘이 넘쳤다. 전화 통화가 끝나고, 이씨의 작품에 등장하는 오동나무 한 그루가 떠올랐다. 옛집 사랑채 마당에 서있는, 꽃 없이도 찬란한 오동나무 말이다.

손민호 기자



시상 고르게 배치 … 균형·리듬감 탁월

심사위원 한마디

시월은 역시 거두는 게 많은 때인가 보다. 응모작이 지난달에 비해 늘고 수준도 높아졌다. 덕분에 여러 작품을 놓고 고르는 시간이 즐거웠다.

이달의 장원으로 '오동나무'를 올린다. 이광수씨는 오동나무의 귀의를 밀도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시상의 고른 배치로 각 수의 균형을 잘 유지하면서 리듬 또한 활달하다. 같이 보낸 시조들도 탁월한 조형 능력을 보여주는데, '낙동강'은 특히 역동적인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다. 완성도 면에서 뽑힌 '오동나무'는 '달 아래 제 그림자를 팔베개하고 누운' '그루터기'의 시간을 선연히 보여준다. '싱싱한 몸뚱이로 새벽빛을 끌어 와서''꽃 없이도 찬란'했던 날들을 이제 '헌옷처럼 벗어놓고' 가는 모습이 여느 사람보다 듬직하다.

차상 박해성씨의 '오늘의 메뉴'는 재치와 재미를 평가했다. 시 쓰기 과정을 언어유희로 경쾌하게 엮어내고 있다. 좀더 깊이 있는 비틀기로 작위성을 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동봉한 시조의 현대적인 언어 감각을 믿기로 했다. 우선 제목과 표현 등에서 구태를 벗었기 때문이다. '연민의 퇴적층'을 '지대로' 보여줄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우리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식을 더 익히는 게 좋을 듯하다. 기존 시조판의 엄숙주의나 교훈주의를 넘어 형식을 갖고 좀 발칙하게 놀아볼 필요도 있다.

차하 정상혁씨의 '가을 저녁'은 이미지 구사가 돋보인다. 시적 수련이 상당한 느낌이다.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표현과 자유시 같은 배열이 걸렸다. 시조는 자유시와 달리 3장 즉 초.중.종장의 소임에 맞는 배치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시상을 초장에 도입하고 중장에서 전개하고 종장에서 전환해 맺을 때 시조의 맛이 우러나온다('가로등'이 더 시조다운 배열이다). 그런 점에서 종장의 '그리고' 같은 선택과 이완을 경계하기 바란다. 이런 점만 유의한다면 새로운 감각의 시조를 쓸 것 같다.

시조 습작 때는 무엇보다 형식 익히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 보면 당초에 자신을 사로잡았던 참신한 시상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음보에 맞는 언어를 고르다가 익숙한 표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낯익은 이미지나 어투.표현 등을 과감히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형식에 익숙해지면 자신만의 시각 찾기에 더 고심해야 한다. 나만의 시각을 확보해야만 개성이 제대로 빛난다.

이 달은 당선작과 함께 논의된 작품이 많았다. 특히 김용채.김환수.노희석.이갑노.김동호.김용회 씨들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했다. 분발을 당부한다.

<심사위원: 김영재.정수자>

◆응모안내=매달 20일쯤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 매달 말 발표합니다. 응모 편수는 제한이 없습니다. 해마다 매월 말 장원과 차상.차하에 뽑힌 분들을 대상으로 12월 연말장원을 가립니다. 연말장원은 중앙 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자(등단자격 부여)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매달 장원.차상.차하 당선자들에겐 각각 10만.7만.5만원의 원고료와 함께 '중앙 시조대상 수상작품집'(책만드는집)을 보내드립니다.

◆보내실 곳=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 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우:100-759), 전화번호를 꼭 적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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