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중심 무장 투쟁「조선국민회」를 주도|비밀결사조직 장일환 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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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 1917년 발족, 3·1운동 이전까지 최대규모의 비밀결사로서 1년여간 평양을 중심으로 대일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펴온 「조선국민회」를 주도한 장일환 의사의 독립운동 공적이 해방 후 근 반세기만에 비로소 인정돼 건국훈장 중 서열 세 번째인 독립장을 받게 됐다.
장의사는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 3월 22일 평양 이보식의 집에서 배민수·백세빈 등과 「조선국민회」를 조직, 회장으로 선출됐고 같은 해 6월에는 배민수·노덕정 등과 식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는 등 회원모집활동을 벌이면서 「국민보」를 배포하는 한편, 중국 무관학교에 입교할 학생을 선발, 파견하는 계획을 추진하다 이듬해인 1918년 2월 9일 일경에 체포 돼 조사를 받던 중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했다.
장의사의 이 같은 활동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와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그는 하와이에서 귀국한 1915년부터 고향인 평양에서 서광조·강석봉 등과 「조선국민회」를 조직키로 하고 이를 추진했었다.
25년 동안 조부의 독립투쟁활동 내용을 조사·확인하는 작업에 몰두해 온 장손 세진씨(52·상업·서울 구로4동 740의 24)는 장의사가 27세 때인 1913년 안창호 선생 등의 후원으로 평양에 국민보통교육을 담당할 「청산학교」를 설립하고 예수교장로회 연화동 교회를 설립해 장차의 무장투쟁을 이끌어 나갈 전진기지로 삼았다고 밝혔다.
장의사는 이어 이듬해인 1914년 자신의 출신학교인 숭실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청년무장결사단체인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 평양근교와 묘향산 등지에서 권총과 칼등으로 무장한 채 훈련을 실시했으며 1916년 봄에는 평양주둔 일본군 헌병대장 관사를 습격하려다 미수에 그치는 등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장의사는 1912년과 1914년 두 차례에 걸쳐 하와이에 밀항,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며 하와이 한국 국민회를 이끌던 박용만을 만나 영향을 받고 이 같은 무장투쟁활동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 세진씨의 설명이다.
세진씨에 따르면 장의사는 귀국 후 혹독한 총독정치의 상황을 박용만에게 알리고 국내에 청년단체를 조직, 국내외에서 서로 호응해 독립운동을 띠나가기로 약속했고 이에 따라 그간의 청년학생운동의 성과와 경험을 토대로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본격적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했다는 것.
「조선국민회」는 「청년단」과 마찬가지로 숭실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회원이 출발 당시에는 20여 명이었으나 1백여 명에 이르는 등 점차 그 세력이 확대됐다. 북한에서는 이를 김일성의 부 김형직이 조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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