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얻기 어려워 「재탕」 출판 성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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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문예물을 내는 단행본 출판사들이 작품 원고를 얻지 못해 아우성이다.
이는 상업성이 보장되는 소위 인기 명망 작가의 수가 한정돼 있고 87년의 출판 활성화 조치 이후 출판사 수는 두배 이상 (5천4백개 사) 증가, 원고 확보 경쟁이 일상화하면서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다. 더욱이 국내 출판사들이 비용이나 절차의 번거로움 등을 이유로 저작권 보호 대상의 최신 외국 저작물을 기피, 국내 작가에게 수요를 집중시키고 있는 것도 원고 구득난을 부채질하는 한 요인이 되고있다.
신작뿐만 아니라 신문·잡지 등의 연재물들도 연재가 끝나는 즉시 당해 매체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일반 출판사들은 지방지 혹은 경제신문 등의 특수지에 줄을 대고 연재물을 출판하는 실정이다.
작가들은 작가들대로 자기 작품을 직접 단행본으로 출판할 경우의 판매 전망에 불안을 느끼는 나머지 신문·잡지 등에 이를 먼저 연재함으로써 원고료 수입은 물론 단행본 출판에 앞서 독자 반응을 미리 가늠할 수 있다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경향이다.
따라서 단행본 출판이 거론될 때마다 작가들은 거액의 선불을 요구하게 되며 출판사가 괜찮은 작가의 장편 소설 한편을 얻으려면 5백만∼1천만원을 미리 건네주고도 1∼2년을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출판가의 일반적 상황으로 굳어지고 있다.
이처럼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원고 얻는 일이 어려워지자 출판가에서는 대표작선집·자선집 등의 명목으로 유명 인기 작가들이 과거에 써서 발표했던 중단편을 추려 단행본으로 펴내는 일종의 편법 출판이 크게 성행하고 있다. 나남 출판사의 「나남 문학선」, 도서출판 한겨레의「한겨레 소설 문학」, 도서 출판 동아의 「우리 작가 우리 소설」,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 총서」, 고려원의 「새로운 작가, 새로운 소설」 등이 그 예다.
이미 발표된 작품을 재 수록하는 형식으로 발간되는 이들 문학선집은 신작 원고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출판사의 고육지계로 볼 수 있으나 인기도를 따라 같은 작가, 같은 작품을 겹치기로 선정, 수록하는 낭비 출판의 부정적 측면이 커다란 문제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출판 소재로서의 작품 기근 현상과 관련, 문예 출판사 대표 전병석씨는 『쓸만한 장편 하나를 얻기 위해 그 작가의 작품집을 내주고 기다리는 방법도 써 보지만 그 경우 2천부 한정판도 미처 소화하지 못해 넉넉지 못한 출판사 사정으로는 출혈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 문예 잡지를 창간, 운영하면서 작가들에게 발표지면을 제공하는 대신 그 작품들을 모두어 다시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등의 작품 확보책을 꾀하고 있는 출판사도 여럿 있다.
열음사 (『문학 정신』), 세계사 (『작가 정신』), 한길사 (『한길 문학』), 도서 출판 예하 (『현대 소설』)가 그같은 예로 이들이 문예진흥원의 원고료 지원마저 중단된 상태에서 단행본 출판사로서는 힘에 겨운 문예지의 적자 발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작가들의 작품 확보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고 작가의 이름을 빌려다 문학상을 제정하고 해마다 수상작과 후보 작품들을 묶어 단행본으로 펴내는 출판사도 있다. 이 경우도 각 문학상의 앞머리에 붙는 선구적 작가의 문학사 적 업적과 가치를 기린다는 명분 외에 단행본 재료가 될 작품을 확보하면서 수상의 명성을 업고 더 많은 책을 팔아보겠다는 상업적 의도가 깔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출판사들이 작품을 얻기가 어렵게 되면서 최근 부쩍 성행하고 있는 것이 흔히 「재탕」 이란 말로 불리는 리바이벌 출판 현상이다. 출판사를 바꾸거나 아예 제목마저 새로 갈아 시중에 내놓는 이들 리바이벌 물은 독자들의 복고 취향을 자극할 뿐 독서문화의 시침을 뒤로 돌리는 분별없는 상혼의 소산으로 비판받고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베스트셀러로도 오르는 등 대체로 판매 성과가 리바이벌전을 훨씬 웃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최근 서점가에 나돌고 있는 리바이벌 출판물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얀 전쟁』 (원제는 『전쟁과 도시』·안정효·실천 문학사·85)=고려원 (89) ▲『청색 시대』 (강석경·까치·80)=한벗 (89) ▲『서 있는 여자』 (박완서·학원사·85)=작가 정신 (89) ▲『나목』 (박완서·열화당·85) =작가 정신 (90) ▲『백기』 (강유일·문예출판사·78 )=우리 문학사 (90) ▲『지구인』 (최인호·중앙일보사·85)=동화 출판공사 (90) ▲『비극은 있다』 (홍성유·대완 출판사·80)=문성 출판사 (90) ▲『샤론 여자 고등학교』 (김범총·여학생사· 85)=삼진 기획 (90) ▲『순교자』 (김은국·삼중당·70)=을유 문화사(90) ▲『대원군』 (유주현· 현대 문예사·80) =동광 출판사 (90) ▲『열국지』 (김구용·어문각. 64)=민음사 (90) ▲『인간의 새벽』 (박영한·까치·80)=고려원 (86).
한 출판업자는 『최근의 리바이벌 출판 붐은 신작 원고 확보의 어려움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지만 출판사들이 출판 소재 발굴에 적극 나서지 않은 채 너무 안이하게 운신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며 『출판사로서는 이것이 새로운 것을 원하는 독자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일종의 의무 유기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교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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