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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 양극화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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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올해 두 살인 케빈은 냉장고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0일 독일 북부 브레멘의 영세민 아파트에서. 경찰은 시신에서 폭행 흔적을 찾아내고 마약 중독자인 그의 아버지를 살인.아동학대 혐의로 체포했다.

케빈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아버지와 살았다. 사회복지사들은 아버지가 아이를 돌볼 능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예산 부족 때문에 케빈을 보호시설에 맡기지 못했다. 일간지 디벨트는 독일 정부의 사회복지 예산 삭감이 사건의 원인이라며 "국가가 돈을 아끼려다 아이를 죽게 했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3일, 독일 동부 츠비카우의 극빈 가정에서 또 다른 비극이 벌어졌다. 네 살짜리 메메트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숨졌다. 조사 결과 너무 굶주려 몸을 지탱할 힘이 없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3년 전엔 독일 동부 콧부스의 빈민가 냉장고에서 데니스라는 네 살짜리 아이가 시신으로 발견됐다. 부모가 굶어 죽은 아이를 냉장고에 방치한 것이다.

이같이 엽기적인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극도로 가난한 실업자 가정에서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견고하다고 믿었던 사회안전망에 대한 독일 국민의 신뢰가 마구 흔들리고 있다.

독일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남다른 국가로 알려져 왔다. 전통적으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제도를 바탕으로 부의 분배와 사회복지를 중시, 복지국가의 모범으로 통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국경 없는 신자유주의 경쟁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두를 위한 무조건적인 복지'는 사라졌다. '사회안전망'은 더 이상 모든 이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게 됐다.

실제로 "독일 인구의 8%인 650만 명이 빈곤층"이라는 연구보고서도 나왔다. 연방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아동 10명 중 1명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4년 연속 세계 최대 수출국가에 오른 독일의 현실이다.

케빈의 사건을 계기로 빈곤.소외계층 문제는 독일 정치권에서 가장 뜨거운 안건이 됐다. 하지만 대처 방식은 냉정하다. 비극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정치인이 "과거처럼 퍼주기식 복지는 곤란하다"며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내세운 '생산적 복지' 추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인 사민당의 후베르투스 하일 사무총장은 "복지국가의 품질을 '금전적 지원이 얼마인가'라는 양적 기준으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우파인 기민당의 로날드 포팔라 사무총장도 "국민이 국가가 주는 것에만 의존하는 옛 동독식 사회보장체제는 곤란하다"고 못을 박았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실업자가 될 위험성이 크다"며 "가난 극복 방안은 빈곤층을 위한 교육과 직업훈련 강화에서 찾자"고 제시했다.

정파를 떠나 독일 정치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국가경쟁력 확보라는 큰 틀에서 고민하며, 해결 방안을 구체적으로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적 인기나 정파적 이익을 위해 무조건 예산 증액만 부르짖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극소수 극좌파가 "복지에 돈을 더 쏟아 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재정 형편을 살피지 않은 비현실적 주장이라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빈곤이나 사회 양극화는 독일보다 어쩌면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케빈의 죽음'이 한국 사회에서 발생했다면 가장 험악한 대정부 비난과, 가장 달콤한 대국민 퍼주기 약속이 난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선진 정치를 배우겠다며 박근혜.정동영.이명박 등 유력 대선 주자들이 앞다퉈 독일을 찾고 있다. 부디 귀국행 선물 보따리에 독일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고민을 담아가길 기대한다.

유권하 베를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