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인식과 이야기 구조 사이서 고심-정종명 『빠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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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소설이 시대의 모습을 언어로 건져 올려 준다는 것은 반드시 반영론의 입장에서만 논의될 사항은 아니다. 어차피 서사 정신의 핵심은 현실과 결박되어져 있고 언어는 사회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한국 소설의 대부분은 이러한 사항에 철저히 복무하는 모습과 애써 이같은 항목을 도외시하려는 두개의 양극단에 자리하고 있지 않나 파악된다. 격변기라고 하는 것은 삶의 터전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그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격변기에 대한 소설적 응전이 극단적인 양극화의 현상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에 지나치게 매달릴 경우 소설이 인간의 탐구이며 새로운 인간의 성격을 이야기의 구조로 직조한다는 점에 소홀할 수 있고, 현실의 정황에 애써 초연 하려는 모습은 인간 삶의 근원적인 양태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오로지 천착하려함으로 소설 의미학적 측면에만 심혈을 쏟는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요컨대 이러한 양상이 90년대의 첫머리에 서 있는 한국 소설의 위상이라 한다면 정종명의 중편 『빠른 바람은 소리로 남는다』 (동서문학·7월호)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운동권에서 투쟁의 선봉장인 대학생 서강욱을 시골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상경하여 직장에 다니는 채란이라는 여자가 우연히 그녀의 자치방에 숨겨준다.
짧은 며칠동안 숨어 있는 사이 둘은 사랑하게 된다.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강욱은 채란의 자취방을 떠나지만 연락이 닿아 강욱을 만나는 현장에서 채란의 고종 오빠 정빈이 경찰에 통보하여 강욱은 체포되고 만다. 강욱은 채란이 경찰에 밀고하여 자신이 붙잡혔다고 배신으로 생각하며 끌러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줄거리다.
작가가 우리 시대의 가장 민감하고 문제되는 학생 시위와 그것이 비롯되게 된 도덕성을 상실했던 집권 계층, 그리고 광주 문제 등을 이야기로 제시하려는 의욕이 작품의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정빈을 정점으로 하는 기득계층 혹은 중간계층이 학생시위와 당대의 현실을 파악하는 관점이 젊은 세대와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점을 소상하게 제시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빠른 바람은 소리로 남는다』를 통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삶의 문제되고 아픈 부분을 깊이 있게 제시하려 하고 있다.
격동하는 현실의 정황을 드러내야 한다는 서사 정신의 기본핵심을 소설이 갖고 있는 이야기의 구조 속에 융합시키려는 정종명의 고심은 이 작품 속에 그 둘의 융합이 안이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채란과 강욱의 사랑관계, 정빈과 채란의 현실인식 편차 등이 단선적 인 구조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반영, 그리고 인간 존재의 천착이 갈등 구조로 짜여지면서 작가 정신의 치열성이 이것을 보다 구체적이면서 복합적인 이야기로 제시할 때 소설에서 갈등의 폭은 확산될 것이다.
현실 인식의 소설적 응전과 그것을 소설의 미학인 이야기 구조 속에 합치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정종명의 『빠른 바람은 소리로 남는다』는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한국 소설이 90년대의 첫머리에 처한 어려움에 작가들이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김의정의 『먹이사슬』 (현대문학·7월호)도 이같은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김선학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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